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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금정산사내 2007. 2. 6. 14:11
 

목로주점

                                                             에밀 졸라


1


   근사한 아침이다. 태양이 살짝 가려진 하늘은 희부옇지만 공기는 아주 상쾌하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종려나무 가지들과 하이비스커스, 미모사 꽃잎들이 잔물결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애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장식장 위의 손목시계를 집어 들었다. 10시. 그러나 이곳에서의 늦잠은 그다지 호사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으레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주점 문을 닫는다. 그리고는 피곤한 몸으로 컵들을 닦고 테이블을 치운 뒤에야 흰 무명 시트 속에 기어들어가 늦게까지 곯아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일부러 고막을 때리는 자명종을 울릴 필요는 없었다. 허둥지둥 세면장으로 가지 않아도 되고 버스 시간에 대느라 정신없이 뛸 필요도 없다. 그저 느지막하게 눈을 떠서는 누운 채로 몽롱한 의식을 가다듬으며 아침 햇살을 만끽하면 되는 것이다. 애나는 이런 한가로움이 참으로 좋았다.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 뒤 그녀는 머리를 매만지며 침대에서 나왔다. BBC의 뉴스를 들으려고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다 지브롤터 방송에 맞췄다.

 영탄조의 영국식 발음으로 어떤 음반에 대한 소개와, 오늘로 만 3살이 되는 마크 뉴먼이란 아이와 함께 듣고 싶다는 시청자의 엽서 소개가 있은 뒤, 코니 프랜시스의 <디나, 너는 나의 공룡>이란 노래가 나왔다. 제법 듣기 좋은 노래다. 그녀는 간밤에 아무렇게나 벗어던져 둔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기며 콧노래로 따라 불렀다.

 창밖의 짙푸른 지중해 위에는 햇살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고 저 멀리 아스라히 아프리카와 잇닿은 지브롤터가 보인다. 그곳은 아주 가깝게 느껴진다. 그녀는 서둘러 커피를 한 잔 마셨다 하루 중 가장 좋은 이 시간을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12시에는 주점 문을 열어야 하고, 4시까지 일을 계속해야 한다. 4시부터 7시까지는 스페인 사람들의 방식처럼 낮잠을 자는 시간이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신은 책에 파묻힐 것이다. 집 뒤 테라스 그늘의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다 보면 잠은 저만큼 달아나 버린다.

 빌라는 매우 조용하다. 다른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다. 테사와 토니는 아직 자고 있을 테지. 아니면 벌써 일어나 나갔을까? 애니는 다가가서 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문 틈새로 스며나온 적막감이 살포시 그녀를 맞이한다. 그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았지만 거기엔 고요한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아 참, 목요일이었지. 두 사람은 읍내 시장에 나간 모양이로군. 곧 돌아올 테지. 평소처럼 그들의 조그만 짐차 트렁크에 병과 스테이크용 고기, 그리고 싱싱한 생선을 가득 채워 가지고. 또 노란 기름이 잘잘 흐르는 닭고기도 가져올 거야.

 애나는 실크로 된 가운을 걸치고 햇빛이 잘 드는 조그만 주방으로 통하는 썰렁하고 어둠침침한 복도로 발길을 옮겼다. 그녀는 항상 알몸으로 잠자리에 든다. 새로 세탁한 시트의 촉감과 자유분방함을 만끽하면서.

 그러한 자신의 버릇을 <육체의 기쁨>이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빗줄기나 햇볕의 촉감을 살갗에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됐다. 그것은 또 머리를 빗거나 이슬 머금은 잔디 위를 맨발로 걸을 때, 가슴을 파고드는 음악을 들을 때, 혹은 소중한 사람의 머리칼 냄새를 맡을 때 느끼는 신선한 감촉과도 같은 거라고 생각됐다.

 물론 시도를 해본 건 아니지만 육체적 쾌감을 맛볼 수 있는 것들은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다만 22살밖에 안 된 자신로서는 아직 그런 것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을 뿐이다.

 "냉혈한!"

 애나는 가스레인지 위에 물주전자를 올려놓으며 딘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아주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었다. 건방지고 뻔뻔스런 그의 얼굴을 보면서 애나는 둘 사이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모두 이지러지고 깨지는 아픔을 느꼈다.

 근래에는 그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추억을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아도 그의 말들은 비수처럼 자신의 가슴을 끊임없이 찔러댔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그의 말이 되새겨질 때마다 가슴을 저며내는 듯한 고통과 분노를 느끼곤 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관계는 끝났어.>

 애나는 테사에게 그런 편지를 보냈었다.

 <그렇게 밖에는 할 수가 없었어.>

 그녀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믿었다. 가슴 한구석에는 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서로 갈라서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날 속였어. 그 생각 때문에 애나는 딘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가 약혼자인 자기를 제쳐 두고 다른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항상 자신의 행위를 요리조리 변명하고, 여러 차례나 계획적으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사실이 드러난 처음에도 그는 교묘히 속여넘기려 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잔꾀가 여의치 않게 되자 뻔뻔스럽게도 그러한 부정한 행위의 원인을 애나에게 덮어씌우려 했던 것이다. 그는 애나가 너무 냉정하고 쌀쌀맞게 혼전의 육체관계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우겨댔다.

 냉정하고 쌀쌀맞다고? 애나는 그런 비난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빈정거리던 그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물이 가득 고일 때까지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애정이 결핍됐다고? 그녀는 포옹의 기쁨을 회상했다. 자신의 입술에 와닿던 달콤한 그의 촉감도. 하지만 육체관계는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어째서 애정의 결핍이라는 거지? 지켜야 할 도덕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혼전에는 순수한 관계로 있어야 하잖아.

 "뭐라고? 로지나 월시와 내가 어쨌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농담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렇게 펄쩍 뛰며 자신의 부정을 부인했다.

 "다 알고 있어요, 딘. 거짓말하려 애쓸 필요 없어요."

 "좋아."

 그는 퉁명스럽고도 거칠게 시인했다. 마치 엄마의 지갑을 훔치려다 들킨 아이처럼.

 "바라는 게 뭐야? 이건 순전히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그렇게 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구."

 그리고 그는 애나가 냉정하고 쌀쌀맞고 애정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만일 그가 모든 걸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난 틀림없이 그를 용서했을 텐데. 테사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애나는 가슴속으로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언니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밝게 보이고 싶어서 있었던 사실을 담담하게 요약해서 써보냈던 것이다. 그런 문제들은 섣불리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린 눈이 빠지도록 널 기다리고 있어."

 테사는 곧 답장을 보내왔다.

 <이번 여름에 우리와 함께 지내지 않을래? 우릴 좀 도와주는 셈치고 말야.>

 동생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테사는 대충만 적은 애나의 편지를 읽고도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을 치르고 있는가를 벌써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피처를 제공해 주려는 배려라는 걸 애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같이 있어도 괜찮다면…>

 애나가 답장을 써보내자 테사는 곧,

 <물론이지.>

 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그것은 구미가 당기는 제의였다. 앞에는 탁 트인 바다가 있고 뒤로는 시에라 베르메하의 경치 좋은 갈색 바위산을 등지고 있는 잿빛의 작은 빌라를 연상했다. 그리고 그 제의를 수락했다. 그러나 개트윅에서 비행기를 탈 때 거기서 자신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그저 동정이나 받는 처지가 된다면 영국으로 되돌아오리라고 마음먹었다.

 다행히 처한 상황이 그녀에게는 위안이 됐다. 토니는 요리를 맡고 있었고, 테사는 덩굴나뭇잎으로 된 그늘집 아래 놓인 테이블과 뒤쪽에 있는 주점의 시중을 드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쁘게 뛰고 있었던 것이다.

 "애나가 우리를 살려 주는군."

 말라가 공항에서 만났을 때, 토니는 애나의 볼에 입을 맞추며 선량한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우리 사업이 제법 괜찮아. 아직 6개월 밖에 안 됐는데도 잘되는 편이거든. 8월이 되면 더 바빠질 거야. 애나가 여기 좀 있어 줘, 적어도 1l월까지는 말야. 그렇게 해줄 수 있겠지?"

 "그럼요, 원하신다면 영원히 머물 수도 있어요."

 애나도 언니를 꼭 켜안고 입을 맞추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3년 만에 만난 자매는 많이 변한 모습들이다. 그들은 둘 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빛나는 황갈색 머릿결을 지니고 있다. 테사는 귀염성있게 예쁜 얼굴이고 애나는 뛰어난 미인형이다.

 비슷한 용모이기는 하지만 애나의 얼굴이 더 자연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다. 애나의 눈은 크고 푸른빛이 도는 게 참으로 매혹적이다. 입은 조그맣고 예쁘장하며 둥그런 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윤곽이 뚜렷한 타고난 미인이다.

 애나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테사를 더없는 미인으로 추켜세웠겠지만, 애나가 태어난 이후로 두 자매는 항상 비교를 당하곤 했다.

 테사는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야릇한 경쟁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본래부터 따뜻한 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애나는… 이를테면 그녀는 좋은 성격이지만 너무나 깔끔한 편이어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질 못한다. 아름다움도 어떤 점에서는 그 한 이유가 됐다. 지나치게 빼어난 미모는 접근치 못할 거리감을 만들어 주었으며, 약간 수줍어하는 듯한 새침한 미소도 타인에게는 때로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방은 내가 들지."

 토니는 자매보다 앞서서 차 쪽으로 걸어갔다.

 "저이 좀 봐. 저인 항상 저렇게 자상하지 뭐니?"

 검게 그을린 손으로 애나의 팔짱을 끼며 테사가 말했다.

 "언니랑 형부는 참 좋아 보여. 만나서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활기있어 보이니 정말 기뻐."

 애나는 형부를 무척 따랐다. 언니 부부는 토니가 런던의 소호에서 요리 책임자로 있을 때 만났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결혼을 발표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었다. 하지만 토니를 만나본 애나는 단번에 그들의 의견에 공감했다.

 형부는 그녀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개성이 강한 남자를 원했다. 형부와 같은 낙천적인 스페인 사람과의 결혼생활은 행복하긴 하겠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좀더 신비로운 생활이다. 딘은 바로 그런 스타일의 남자다.

 "하지만 꿈이 빗나갔어."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주전자를 들어 커피포트에 부었다. 포트에서는 구수한 커피 향이 배어나왔다.

 커피가 끓는 동안 거실을 지나서 테라스 뒤쪽으로 가보았다. 대여섯 마리의 작은 들고양이들이 잔디 위에 동그마니 모여서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다.

 스페인에 온 첫날, 애나는 길 잃은 고양이들이 안쓰러워서 음식 찌꺼기들을 던져 주었다. 그들은 상한 빵 조각과 닭뼈다귀들을 게걸스럽게 주워먹으며 혹시나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 사방으로 눈을 번득였다. 가끔씩 접대용 음식을 노리고 살그머니 주방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아이쿠, 저것들을 어떡하지!"

 주먹으로 이마를 툭 치며 토니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처제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하지만 온 스페인 천지의 길 잃은 고양이들을 다 먹여 살릴 순 없잖아! 애나의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그 불쌍한 것들을 돌보다니 참 너다운 행동이구나. 그래 한번 마음대로 해보렴."

 테사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다음 일은 보지 않아도 뻔해. 저것들이 온 집안을 들쑤셔 놓을 거야."

 "하지만 저 새끼 고양이는 그냥 두면 굶어죽을 것 같애."

 애나는 납작한 귀를 쫑긋 세운 채 호박색의 동그란 눈으로 날아가는 새를 응시하고 있는 지저분한 얼룩무늬의 새끼 고양이를 가리켰다.

 "저것들은 모두 그래. 야위고 굶주려 있어. 토니 말대로 떼거리가 너무 많아서 큰 골칫덩이지. 너도 결국엔 두손 들고 말 거야."

 "난 안 그래."

 애나는 맹세했다. 그녀는 동물을 사랑한다. 어떤 점에서는 사람보다도 더.

 다음날 아침 애나는 테라스의 선베드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보았다. 그녀가 먹이를 들고 부르자 어느 틈엔가 다른 곳에서 한 떼가 나타나 자그마한 핑크빛 주둥이들을 벌리고 애원조로 야웅거리기 시작했다.

 먹을 걸 던져 주자 그들은 서로 먼저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어느 새 이 일이 일상적인 것으로 돼버려 애나는 스페인에 온 이래 3주 동안 매일 한 떼의 고양이를 돌보게 되었다.

 오늘도 슈퍼마켓에서나 얻을 수 있는 신선한 우유 한 접시와 언니 내외가 모아 준 음식 부스러기를 가지고 새 가족의 아침을 주러 나갔다.

 손님은 여섯이었다. 본래의 식구인 다섯 마리가 친구 한 마리를 초대한 모양이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딱 너희 여섯뿐이라야 해. 다른 손님을 끌어들여선 안 된단 말야!"

 애나는 그들에게 잔소리를 했다.

 "토니가 알면 당장 쫓아내려고 할 거야. 그러면 나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게 돼."

 고양이들과 헤어져 안으로 들어와 샤워를 한 뒤 핑크색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산호 목걸이를 걸고 가죽 샌들도 신고. 그리고 나서 검고 긴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했다.

 그녀는 집안일로 바쁘게 움직였다. 안 쓰는 컵과 찻잔도 닦아서 정돈해 놓고 돌로 된 바닥도 윤이 날 정도로 쓸고 닦았다. 계속 이곳에 머무는 게 좋을지 어떨지 걱정되고 또 동시에 자기에게 도피처를 만들어 준 언니 내외한테도 순수한 마음으로 보답하고 싶다.

 시간의 흐름을 망각한 채 일에 열중하다가 얼핏 시계를 보니 이미 정오가 지나 있었다. 주점엘 가봐야지. 토니와 테사는 늦는 모양이다. 평소엔 l1시 정도면 왔는데.

 주점 겸 식당은 집과 붙어 있다. 토니가 도시계획법과 허가를 무시하고 임의로 그렇게 만들어 놓았지만 관청에서도 별말이 없었다. 이곳 관리들은 법석을 떠는 영국의 공무원들과는 달랐다.

 해변 근처엔 손님이 없었다. 애나는 출입문을 열어 놓고 로큰롤을 틀었다. 그 멜로디는 때론 클래식보다 더 듣기 좋기도 하지만 울적할 때면 아주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녀는 컵들을 닦았다. 토니는 어딜 간 거지? 손님이 곧 밀어닥칠 텐데. 난 요리에는 영 자신이 없는데.

 "안녕하십니까."

 그때 한 남자가 갑자기 유창한 영어로 인사하며 들어섰다. 하지만 체격이나 피부색이나 태도를 보아 분명 스페인 사람 같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은 청동색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 값비싼 흰 바지에 보드라운 흰 사슴가죽 구두를 신고 있고, 푸른 줄무늬가 있는 스탠딩 칼라 셔츠는 검게 그을은 얼굴과 산뜻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고급 옷이 잘 어울려 보이는 늘씬한 사람이다. 여유있고 교양 있어 보이는데다 세련된 맛도 풍긴다. 휴일에 몰려드는 여느 손님들과는 달라 보인다. 그 손님들은 그저 휴식이나 취하려고 하지 맵시를 생각하거나 품위를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애나는 스페인 어로 인사를 했다. 기껏해야 두서너 마디밖에는 할 줄 모르지만. 다행히 여기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영어를 아주 잘한다.

 "빌랄바는 어디 갔습니까?"

 "토니 말씀이세요? 지금은 없지만, 곧 오실 거예요. 좀 앉으세요.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그는 빙긋 웃으면서 괜찮다고 사양했다.

 "토니가 오면 크리스티안 카사스가 다녀갔다고 전해 주십시오."

 "네, 그러죠."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다. 핸섬하고 제법 자신만만해 뵈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기가 그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생각해 보았다. 약간의 조바심 같은 걸 느끼면서. 내게 좋은 인상을 느꼈을까? 시골길을 가다가 아주 귀한 골동품을 발견한 사람의 심정일까? 골동품을 찾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걸 소유하고 싶은 마음일 텐데.

 그가 떠나자 그녀는 찬 얼음물을 몸에 뿌렸다. 무척 더운 오후다.

 "휴우, 우리 왔어. 너무 늦어 미안하다. 걱정했니?"

 테사가 법석을 떨면서 들고 온 멜론을 식탁에 내려놓고는 반으로 쪼갰다. 향긋한 냄새가 풍겨나왔다.

 "아니 별로. 그냥 왜 안 오나 궁금했어."

 "휴우!"

 말 않고는 못 배길 그런 비밀을 가진 사람처럼 테사가 애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입을 억지로 다문 채 배시시 웃기만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잠깐만 기다려, 곧 알게 돼. 네가 좋아할 일이야."

 "뭔데? 도대체 뭔데 그래? 말해 봐, 언니."

 애나도 조금은 짐작이 가는 일이다.

 "얘두 참, 사실은 나 아기를 가졌어. 토니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몰라. 그이는 축배를 들자며 최고급 샴페인을 사가지고 왔어. 2파운드나 되는 걸로 말야."

 "와아, 언니 축하해!"

 애나는 테사를 끌어안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느님의 은혜지 뭐. 때때로 난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단다."

 "언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어, 형부도 마찬가지고. 아 참. 크리스티안 카사스란 사람이 형부를 찾아왔었어."

 그 소리를 듣더니 테사의 얼굴이 갑자기 시무룩해진다.

"그 사람… 뭐라던?"

 "그냥 자기가 다녀갔다고만 전하래."

 애나는 당황했다.

 "뭐 나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참 골치 아픈 사람이야."

 테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애나는 언니의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토니가 전에 그 사람 밑에서 일을 했었거든."

 조용히 테사가 설명했다.

 "그 사람은 읍내 번화가에 둘시네아란 나이트클럽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독립하기 전까지 토니는 거기서 주방장으로 일을 했었지. 카사스는 앙심을 품고는 늘 우리 주점을 문닫게 해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야. 그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야. 이 지방에서는 꽤 영향력있는 유지급이니까."

 "앙심을 품었다고? 왜? 뭣 땜에?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언니네가 자기네 손님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애나는 테사가 속상해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둘시네아는 지금도 잘되고 있으니까. 토니 덕분에 제법 명성을 얻었거든. 사람들은 거길 코스타델솔의 명소라고 생각해서 음식을 먹으러 아주 차를 타고 모여들 정도니까. 지금 있는 요리사도 꽤 잘하는 편이고, 그래서 카사스도 대우를 퍽 잘해 주나 봐. 그런데 문제는 자존심이겠지. 토니가 자길 벗어나서 독립한 게 못마땅한 거야."

 "왜? 형부는 자유롭게 자신의 직업을 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

 "네가 카사스를 잘 몰라서 그래. 그 사람은 사람들을 소유하고 싶어하거든. 그래서 토니도 계속 자기 밑에 두려고 했는데 잘 안 되니까 노발대발하는 거야."

 애나는 잠시 마주쳤던 카사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퍽 억세 보이긴 했다. 자존심도 굉장할 것 같다. 사람을 위압하듯이 꼿꼿이 서서 웃을 때도 얇고 긴 입술을 꼭 다문 채였어.

 "그래, 그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언니네 주점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거야?"

 "응, 그럴 수 있을 거야. 아직은 토니를 설득해서 제왕같은 대우를 해서라도 데려가고 싶기 때문에 참고 있는 거지. 만약 토니를 골탕먹일 작정만 하는 날이면 당장에라도 관청에 압력을 넣어서 그렇게 할 거야."

 "형부도 생각해 봤대?"

 애나는 언니 내외가 걱정스럽고, 더욱이 뱃속에 있는 아기의 미래 때문에 애가 탄다.

 "괜찮아.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돈은 좀 모았으니까. 카사스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야지 뭐. 대우를 암만 잘해줘도 토니를 거기 가서 일하라고는 못하겠어. 나까지 그런 소리를 한다면 그이가 얼마나 서운하겠니? 카사스는 인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 사람 위에 군림하려 들거든."

 애나는 언니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비난하는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카사스에 대해 말하면서 테사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마구 욕을 해댔다. 자기들의 낙원을 깨뜨리려는 사람이니까 언니가 그렇게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자아, 샴페인을 가져왔어. 우리 애기가 뱃속에서 머리가 젖어 버릴 정도로 한번 마셔 보자구."

 토니가 주점으로 들어올 때 애나는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의 따뜻한 심성이 주점 안에 가득 채워지는 것 같다.

 테사는 잠깐 멈칫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선반에서 컵을 내려 탁자 위에 놓았다.

 "그 사람이 다녀갔대요."

 "흠, 그래? 신경쓸 것 없어."

 토니는 테사의 볼에 입을 맞추며 대꾸했다. 그리고는 다리 사이에 샴페인 병을 채운 채 마개를 따서는 거품이 이는 술을 컵에 가득 따랐다.

 "어떻게 걱정을 안해요? 자꾸 신경이 쓰여 죽겠어요."

 "자, 자, 오늘만은 신경쓰지 말자구. 즐거운 날 아냐."

 "건배!"

 애나는 컵을 들어 축배를 들면서 그들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2



 이튿날은 금요일로 일주일 동안의 수입을 은행에 예금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테사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걸 느꼈다.

 "이제 정신이 번쩍 나. 임신인 걸 알았으니 책을 뒤적여서 모든 증상에 대해 알아봐야지."

 그녀는 타월 천으로 된 낡은 가운을 걸친 채 소파에 앉아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애나는 그녀가 피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토니는 욕실에서 면도를 하며 고래고래 <그라나다>란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언니 대신 내가 은행에 다녀올게."

 애나가 제안을 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성가신 일에서 벗어나 빌라에서 약간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애나는 모처럼 만에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을 테고.

 "그래 주겠니? 아휴, 살았다!"

 테사는 힘없이 미소를 지으면 고마와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갔다올게."

 돈은 자루에 담겨서 가지런히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지난밤에 토니가 잔돈은 꼼꼼히 꾸러미로 만들었고 지폐는 천페세타씩 다발로 묶어 놓았던 것이다.

 애나는 자기의 황갈색 핸드백 줄을 늘여 전리품이나 되는 것처럼 그것을 어깨에 척 걸쳤다.

 "올 때 뭐 사올 거 없어?"

 "비누하고 반창고나 좀 사다 줘. 어젯밤 맥주 병마개에 손을 베었어. 물에 닿으니까 너무 쓰리더라. 그리고 복권을 몇 장 사와 봐. 혹시 아니? 일등에 당첨될지."

 "알았어. 그럼 이따 봐.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올게."

 "천천히 다녀와. 급하게 차 몰지 말고."

 시내에 있는 은행까지는 7km 정도 되는 거리였다. 도로는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2차선이다. 차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을은 손과 손톱에 칠한 핑크색 매니큐어가 잘 조화되어 보인다. 엷은 카키색 면 티셔츠 위에 입은 흰 조끼와 끈으로 맨 샌들이 그녀를 경쾌하게 보이게 한다.

 테사가 이스트본에 계신 어머니께 곧 할머니가 되실 거라는 소식을 전화로 알렸더니 어머니는 너무나 기뻐서 2주 동안이나 눈물을 흘렸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금요일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인파로 붐볐다. 애나는 광장을 두 바퀴나 돌고 나서야 겨우 주차할 만한 곳을 찾아냈다. 후진 신호를 켜고 그곳으로 들어가려 했을 때였다. 누구도 그녀의 의도를 모를 리 없건만 갑자기 산뜻한 빨간색 페라리 한 대가 잽싸게 그곳을 차지해 버리는 게 아닌가!

 "여보세요!"

 애나는 화가 나서 그 운전사한테 악을 썼다. 그리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지만 욕을 좀 퍼부어 주려고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페라리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거기서 크리스티안 카사스가 나오는 게 아닌가.

 "세상에!"

 카사스는 애나 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흘렸다. 그는 분명 자신이 누구에게, 또 무슨 행위를 했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애나에게 보여 주려 했으리라. 자신이 거물이라는 사실을.

 "흥, 아주 나쁜 사람이군!"

 그녀는 그에게 경멸적인 말을 퍼부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더니 손을 들어 비웃듯이 흔들어 보이고는 은행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쁜 자식!"

 애나는 투덜거리며 광장을 또다시 돌았다. 겨우 비좁은 틈을 찾아 가까스로 차를 밀어넣었다. 인도에 서 있던 스페인 소년들이 그녀에게 뭐라고 야유를 던지며 휘파람을 불어댄다.

 엔진을 끄고 안정을 되찾으려고 잠시 의자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흥분을 삭이고 냉정을 되찾자 벌겋게 상기됐던 얼굴도 차츰 가라앉는 것 같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느린 걸음으로 은행을 향해 걸었다. 만일 카사스와 다시 마주친다면 보기 좋게 한 대 올려붙이리라.

 은행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작은 눈에 여우 같은 얼굴을 한 소년 하나가 그녀 옆에 붙어서더니 그녀를 밀어젖혔다. 그리고는 어깨에 건 백을 잡아채는 게 아닌가. 애나가 안 놓치려 하자 그녀의 손목을 세게 비틀어 결국 백을 낚아채고야 말았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잽싸게 돈가방을 낚아챈 날치기는 저만치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라. 강도야! 이리 내놔. 저 강도 좀 잡아 줘요!"

 그녀는 아픔도 잊고 외쳐댔지만 소리는 입안에서만 뱅뱅 돌뿐이다. <도와 줘요>라는 말이 스페인 어로 뭐더라? 아무도 그녀를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못 본 척하고 있었고 주변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데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이 은행에서 나오더니 날치기를 향해 럭비 시합에서 태클을 하듯이 내리덮쳤다. 둘은 엎치락뒤치락 격투를 벌이더니 잠시 후에 어려 보이는 그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빠져나오려고 바둥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용감한 기사는 바로 크리스티안 카사스가 아닌가. 그는 날치기에게서 되찾은 애나의 백을 트로피처럼 받쳐들고 있었다. 마치 사냥대회나 낚시대회에서 탄 것이나 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애나에게 백을 건네주지 않았다. 애나가 그에게로 와서 받아 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저,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쉿!"

 그는 희미하게 웃고는 전날 만났을 때의 그 복잡한 표정으로 애나를 바라보았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글쎄요, 미스…"

 "던, 애나 던이에요."

 "나와 점심 같이할 수 있겠소?"

 "점심요?"

 애나는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되물었다. 마치 그 말이 그녀가 잘 모르는 외국말이기라도 하듯.

 "그렇소, 함께 점심을 들 수 있겠소? 괜찮다면 이런 저런 얘기라도 좀 나누고 싶은데. 포도주나 요리를 들면서 말이오."

 "글쎄요, 고맙기는 하지만… 전 일을 해야 하거든요."

 "일요일에 말이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애나는 이 사람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만 든다던 테사의 말을 상기했다. 그는 아예 명령조로 말을 한다. 일요일에는 주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당당한 태도가 싫어서 선뜻 응낙하고 싶지가 않다. 또 누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걸 본래부터 싫어하는 성미기도 하다.

 기분이 상해서 눈을 내리뜨는데 그의 값비싼 구두가 너절해진 것이 보인다. 또 위를 보니까 날치기와의 격투 때문에 말쑥하던 바지는 흙투성이가 되어 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까 턱에도 허물이 살짝 벗겨졌고 왼쪽 뺨엔 퍼런 멍자국까지 있다.

 "네, 그렇게 해요. 일요일에 시간을 내겠어요."

 "좋소, l시에 모시러 가죠."

 그는 고개를 까딱해 보이더니 그대로 휙 돌아섰다.

 테사에게 뭐라고 설명을 한담? 내가 잘한 걸까? 애나는 마음이 산란해졌다.

 "정말이지,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

 점심 손님이 빠진 뒤인 4시 무렵, 자매는 식탁을 치우고 있었다. 테사는 아무 대답이 없다. 아마도 애나에게 들은 얘기를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니면 테사는 무언의 시위를 하는 걸까? 네가 어떻게 그런 철없는 짓을 할 수 있니, 하고.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

 애나가 말했다.

 "그 사람이랑 얘기하다 보면 주점 건에 대해서도 얘기가 나올 거고…"

 애나는 머뭇거리다가 강조하고 싶은 얘기를 털어놨다.

 "난 언니랑 형부를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거야."

 그러나 자신도 이 말을 믿기가 어렵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일 때 뭐라고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던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를 위하는 일이 아냐. 뭐랄까, 네가 그 사람과 점심 먹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난 네 생각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솔직히 네가 걱정이 되는 거야. 알다시피 난 카사스가 아주 싫어. 그 사람은 아주 불쾌한 사람이야."

 "나도 그 사람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어. 아무리 그가 매력적이라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

 "정말 그럴 수 있겠니?"

 "그렇다니까."

 그러나 애나는 언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테사는 식탁 구석에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양초 조각을 손톱으로 긁느라고 허리를 굽혔다.

 "넌 그 사람을 설득해서 원만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절대 불가능할 거야. 오히려 그 사람이 너를 설득해서 우리를 자기 뜻대로 하려고 들걸.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건 네가 또 한번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될까 봐서야."

 "괜찮아, 난 자신을 지킬 수 있어."

 애나는 금빛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었다.

 "네가 딘과 약혼했을 때…"

 테사는 한 손을 오므려 양초 부스러기들을 쓸어담은 뒤 손바닥으로 다시 한번 식탁을 문질렀다.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말은 안했지만 난 네가 아주 큰 실수를 저지르는구나 생각했어."

 "솔직히 난 딘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잘 몰랐어."

 "잘 몰랐다고? 분명한 거지. 내가 느끼기엔 카사스도 마찬가지야. 미남이고 무례하고 자기만 아는 사람이야. 바로 그런 타입의 사람만이 네 마음을 끄는 것 같구나. 하지만 결국엔 네 가슴을 상하게 하잖니? 두번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래."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애나는 테사의 염려와 사랑을 깊이 느끼며 언니 옆에 섰다.

 "나도 카사스가 언니와 형부에게, 또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별로 좋은 인상을 못 줬다는 걸 알아.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내 백을 되찾아 줬어. 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의 제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던 거야. 격투를 하느라고 그 사람 옷은 찢어져 버렸어. 그가 없었다면 언니의 돈을 모두 잃어버렸을 거야. 정말 난 얼마나 고마왔는지…"

 "넌 물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지."

 테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지 명심해야 할 건 아주 조심해야 된다는 거야."

 일요일 아침, 동이 텄다. 밝고 붉은 기운이 감도는 청명한 날이다. 언니가 승낙했을 때, 애나는 그녀를 좀더 잘 보살피리라고 다짐했다. 테사는 피곤하고 탈진해 보였다.

 임신만으로도 벅찰 텐데, 또 다른 걱정을 끼치진 말아야지. 크리스티안 카사스와의 점심 약속이 언니의 기분을 더 악화시킨 걸까? 언니에게 병원에 입원하거나 법정에 서는 등의 고난이 닥치는 건 아닐까? 애나는 그런 근심을 털어 버리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더부룩해져 왔다.

 "너도 토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조금씩 홀짝거리며 테사가 얘기를 시작했다. 볕이 내리쬐는데도 빌라 안은 서늘하다. 영국과 달리 이곳은 공기가 건조하기 때문에 온기가 오래 스며 있질 못한다.

 "그인 약속을 잘 지켜. 신앙심도 돈독해서 우리가 모두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도 열심히 하지. 또 사업이 번창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하고. 그 덕분인지 사업이 순조로운 편이야. 그래서 오늘 우린 여기서 1OO km나 떨어진 그가 성장한 마을에 있는 교회로 가서 무언가 다른 소원들을 빌려고 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안 그래, 기분전환이 될 거야. 참, 그러고 보니 서둘러야겠다. 준비를 해야지."

 테사는 준비하는 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욕실로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나왔다. 애나가 보기엔 아주 기운이 있어 뵈는 게 퍽 산뜻하다.

 "다 됐지?"

 테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임신한 사람답게 조심조심 옷을 입었다. 테사는 전적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지만 토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남편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

 "즐겁게 보내."

 교회로 떠날 때 테사는 말쑥해진 토니의 팔짱을 끼며 애나에게 말했다.

 애나는 마음도 가다듬고 옷치장에도 신경을 쓰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어디로 갈 건지 알 수가 없어 옷 입는 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둘시네아는 저녁시간을 보내는 곳이고, 더욱이 크리스티안― 글쎄, 그를 이름만으로 이렇게 불러도 될까?―이 차로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거긴 아닐 거야.

 애나는 노란색 정장을 입었다가 벗어 버리고 <토니 주점>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 평상복을 입는 게 실례일지도 몰라… 그러다가 결국은 입기에 편안한 흰 바지와 목둘레가 넓게 팬 짙은 감색 셔츠를 입고 샌들을 신기로 했다.

 "내가 왜 이렇게 신경을 쓴다지?"

 거울 앞에 서서 머릿결이 곱게 보이도록 빗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산뜻한 내음의 향수를 손목과 귀밑, 그리고 가슴에다 살짝 뿌렸다.

 액세서리는 뭘로 한다지? 그녀는 약간의 패물과 장신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영국에 있을 때 친한 친구가 선물로 준 하얀 조개 귀걸이를 달기로 했다.

 "흠… 좋은데?"

 그녀는 흡족해하며 몸을 이리저리 돌려 거울에 비춰 보았다. 이만하면 됐잖아? 카사스가 대단한 미남이라고는 하지만 나도 남한테 빠질 정도는 아니니까.

 몇 시나 됐을까? 이제 겨우 ll시 30분. 아직 1시간 반이나 남아 있다. 물론 데이트에 대해 기대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약간의 설렘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박하 향내가 섞인 레몬 차를 컵에 따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차를 마시며 사전을 들고 스페인 어 공부를 하기 위해 <인터뷰>라는 잡지를 읽었다. 지구의 한 부분인 이 나라의 언어를 최소한 읽을 수 있기만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카사스가 바람결처럼 다가섰다.

 "어머!"

 애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나 있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틀림없이 1시. 그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온 것이다.

 그는 어깨를 딱 벌린 채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를 응시했다. 뺨에는 아직도 상처 자국이 조금 남아 있다. 그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라게 했다면 사과하겠소. 옆문이 열려 있기에…"

 그는 약간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그는 엷은 청색 셔츠를 입고 있는데 풀을 먹인 소맷부리가 검게 그을려 억세 보이는 손과 잘 어울린다. 손가락이 퍽 길군, 피아니스트나 바이올리니스트 같애. 애나는 그 맵시있어 뵈는 손가락이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그리고 신들린 사람처럼 팽팽한 현을 켜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봤다. 하지만 그에게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준비 다 됐소?"

 "왜요? 아직 안 된 것 같아요?"

 아참, 이런 말투를 쓰면 안 되지. 말을 골라서 사용할 필요가 있는데.

 "당신은…"

 햇빛에 그의 선글라스가 번쩍인다.

 "너무 완벽해 보이는군요."

 적어도 그는 <아름답다>라는 직접적이고 우둔한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애나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그 말 속에는 보다 더 완곡한 뜻이 스며 있는 것 같다.

 "자 그럼 갑시다."

 그가 앞장서서 정중하게 빨간색 페라리의 문을 열었다.

 "호세바누스 레스토랑으로 갑시다. 항구 쪽에 있는데 당신도 마음에 들 거요."

 "좋아요."

 그가 자신을 위해 미리 생각을 해둔 것 같아 애나는 선선히 동의했다.

 해안을 따라 lOkm쯤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빠르고 안락한 쾌적감이 애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따금씩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요란하게 오토바이를 몰고 경쟁이라도 하듯 쫓아왔다. 카사스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가는 액셀을 콱 밟아 그들을 뒤로 떨어뜨려 버리곤 했다. 애나는 약간 우쭐한 기분을 느꼈다.

 그가 말한 대로 레스토랑은 아주 맘에 들었다. 연한 자줏빛, 쪽빛으로 물든 메꽃들이 대나무 줄기를 타고 아름답게 피어 있다. 그들은 다채로운 색깔로 만발한 꽃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레스토랑의 주인이 직접 가져온 메뉴를 보며 차가운 백포도주를 마셨다. 주인은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한 뒤 카사스와 서로 스페인 어로 의례적인 자기 소개를 했다. 스페인 어를 못 알아듣는 애나는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흘려 들으며 약간의 소외감을 느꼈다.

 낯선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되면 설사 그가 정감있는 사람일지라도 아주 부담스러울 텐데 카사스는 전혀 자상하지 않은 것 같다. 애나는 마음도 편치 못한데다가 무슨 요리가 나올지 메뉴도 읽을 수 없어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다른 이들은 잘도 먹는데, 고기가 질겨 혼자만 쩔쩔매면서 그저 거대한 접시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 황새치 요리도 있군. 특별요리겠는데?"

 카사스가 메뉴를 훑어보며 말했다.

 "한번 먹어보겠소?"

 잠시 동안 애나는 입구 쪽에 진열된 그 생선을 바라보았다. 은색 비늘에 도리깨 같은 꼬리가 달려 있고 크기는 백상어만하다.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

 "굉장한데요."

 애나는 눈을 깜박이며 웃었다.

 카사스는 손짓으로 웨이터를 불러 와인을 주문했다. 와인이 오자 그는 음미해 볼 생각도 않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러더니 셔츠 주머니에서 안경집을 꺼내 선글라스를 집어 넣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스페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아주 좋아요. 거의 모든 게…"

 "거의라고?"

 한쪽 미간을 치켜올리며 그가 물었다.

 "네, 스페인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맘에 들어요. 정감있고 아주 따뜻해요. 또 햇빛도 좋고, 바다와 산도… 하지만 맘에 들지 않는 점도 몇 가지 있어요."

 "예를 들면?"

 "음… 동물에 대한 태도 같은 거요."

 그녀는 굶주린 고양이들을 떠올렸다. 또 도로를 배회하는 개들이 질주하는 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먹을 것에만 정신을 팔던 모습도 생각해냈다. 그리고 넓은 경기장에서 소들이 잔뜩 약이 오를 만큼 놀림을 받다가 결국 창에 찔려 처절한 울부짖음 속에 죽어 가는 장면도 생각났다.

 "투우란 게 아주 증오스러워요."

 "나도 그렇소."

 믿어지지 않는 말이다.

 "당신들 같은 위선적인 영국 사람들이 휴일이면 이리로 와서…"

 그는 잠시 말을 삼켰다. 그리고 잔을 잠깐 만지작거렸다.

 "그저 여행자들이 호기심이나 찾으려고 드니까 그런 시합이 계속되는 거요. 그런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고 즐기는 족속들이 있으니까 흥행에 성공하는 거지."

 애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사스는 자신이 공감할 만한 확신을 가지고 얘기했다. 드리이브 중에 본 도로변의 허술한 농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모여 있나 유심히 봤더니 임시 변통으로 만든 투우장에서 뼈만 앙상한 소가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에 애나는 눈을 감아 버렸었다.

 "난 당신네 민족이 아주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 느껴져요."

 "내 민족이 아니죠."

 그가 말을 되받았다.

 "단지 한 민족, 어떤 민족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거요."

 딘의 독기 어린 눈빛이 생각난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을 처음 봤을 때의 훤칠하고 강인해 뵈던 모습도 회상된다. 바로 그의 이름이 테사를 시름에 잠기게 하는 것이다.

 "더 특별한 건 남자란 족속들이죠."

 의미있는 말투로 애나가 말을 받았다.

 그는 마치 먼 지평선에 뭔가 주의를 끄는 것이 있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 너머를 바라보았다.

 "당신 생각엔 여자들은 잔인할 수 없다고 생각되오?"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얼핏 스쳐 지나가는 그의 표정 속에 슬픈 과거의 편린들이 묻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크리스티안 카사스의 또 다른 일면이다.

 차차 평정을 되찾으며 그는 일상적인 질문을 애나에게 던졌다.

 "보트 타기를 좋아해요?"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실이지 그녀는 보트를 무척 좋아했다. 비록 일상에 묻혀 통 짬을 못내고 있긴 하지만.

 "내게 보트 한 척이 있어요. 이름은 <네누파르>요."

 "배가 있다고요?"

 그녀는 항구 쪽으로 눈을 돌려 큰 돛대, 호화스런 요트들, 닻을 내린 채 출렁이는 순양함 등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수리중이기 때문에 배를 띄울 수 없지만 원한다면 식사 후에 안내해 드릴 수는 있소."

 항구 끝에는 낡은 고깃배가 하나 보인다. 물 밖으로 끌려나와 받침목 위에 놓여진 그 배는 페인트가 벗겨져 있고 주변에 떠 있는 백만장자들의 보트에 비해서 너무 초라해 보인다. 네누파르란 보트는 크고 화려할까? 아니면 저 고깃배처럼 작고 볼품없을까?

 그녀는 카사스가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마주치는 바람에 눈을 반쯤 감은 채 키를 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바다의 힘에 맞서 나갈 만한 사람, 그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웨이터가 생선요리와 샐러드, 그리고 투명한 유리병에 포도주를 담아 가지고 왔다. 생선요리는 맛이 있었다. 포도주의 알콜 기운이 감미롭게 퍼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우리 언니가 임신을 했어요."

 무모하긴 하지만 애나는 토니와 테사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그는 잔을 들어 축하를 표한 뒤 쭉 들이켰다.

 "물론 힘이 들겠죠.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행복해 보여요. 사업이 잘돼 나가니까요."

 그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다만 생선 한 점을 입에 넣을 뿐이다.

 "당신이 그들의 사업을… 반대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오, 맙소사, 이게 아니었는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얘기를 풀어나가려 했는데 엉뚱하게도 힐난조의 말이 튀어나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한마디 대꾸도 없이 음식만 삼키고 있다.

 "난 그들이 합법적인 절차를 밟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토니는 좀 즉흥적인 사람이라 형식적이거나 행정적인 일처리에는 서툴잖아요."

 "미안하지만, 이렇게 즐거운 식사중에 빌랄바에 대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그가 차갑게 말했다.

 애나는 그가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레스토랑에 가득한 부유층의 사람들도 싫다. 옆 테이블에서 그들은 음식을 함부로 뒤적거리며 지루하고 나른한 태도로 품위라곤 하나도 없는 표정들을 짓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족제비처럼 분에 겨울 만큼 잘 차려입고 잘 먹은 뒤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으스댄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탄력있는 몸매를 지닌 아가씨들이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올챙이배를 한 백발노인들의 팔에 안겨 있다. 또 탐욕에 젖은 두툼한 입술의 젊은 남자들이 애완용 개처럼 리본과 다이아몬드로 치장한 유한 마담들을 따라다니고 있다. 부유한 자들은 자신들이 가난한 사람들과는 달리 특별하고 우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마저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의 부유함 속에서 애나는 황폐한 정신을 보았다. 그녀는 전율을 느꼈다.

 "춥소? 일사병에 안 걸리도록 조심해야 하오. 여기 날씨에 적응 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아뇨, 괜찮아요."

 "다른 걸 좀 들겠소? 딸기라든가…"

 "아뇨, 정말 괜찮아요."

 "커피는?"

 "아무것도 생각없어요."

 그녀는 모든 걸 사양하고 싶었다. 그는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마지못해 그녀는 크리스티안과 함께 상점, 레스토랑, 울긋불긋한 여성용 장신구점, 카페, 젊은이들이 차나 브랜디를 마시는 주점 등을 지나쳐 걸었다.

 그의 걸음은 애나가 보조를 맞추기에는 너무 빨랐다. 그녀가 자꾸만 뒤로 처지자 그는 그때서야 그걸 눈치채고는 씩 웃으며 걸음을 늦추었다.

 "바로 여기요."

 "여기라뇨?"

 애나는 약간 실망한 듯이 물었다.

 "이거라구요?"

 그녀는 기대가 어긋나서 실망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그가 가리키는 건 주변에 들어서 있는 시시한 배들이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모양 좋은 보트였던 것이다. 선미에 일광처럼 선명하게 <네누파르. 푸에르토 바누스>란 글귀가 씌어 있다.

 "갑판으로 올라와요."

 그는 그녀의 망설임을 알고는 다시 한번 권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어디선가 잔뜩 그을린 피부에 유니폼을 차려입은 사람이 나오더니 카사스에게 경례를 했다. 카사스는 그에게 뭐라고 명령조로 지시했다.

 "난 보트가 이 정도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갑판 밑으로 내려왔을 때 애나가 말했다.

 "웅장해서요?"

 "아뇨, 무척 커서요."

 애나는 정정했다. 압도된 듯한 태도를 나타내기가 싫어서다. 그러나 선실에 가득찬 고급스런 가구, 중국산 카펫, 유화, 골동품 등의 희귀한 진품을 보고는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름 냄새와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 물에 밴 역한 냄새 등만 없다면 그야말로 호화 아파트의 응접실처럼 느껴질 정도다.

 "집에서처럼 편안하게 즐기시오."

 집에서처럼? 집은 서식스 해안에 있는 오톨도톨한 방갈로인데 어떻게 여기서 자신이 편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집에는 방이 3개 있는데, 벽에 거는 초라한 융단과 대형 괘종시계가 걸려 있다. 유리문이 달린 책꽂이에는 디킨스 전집이 꽂혀 있고. 채널이 셋 달린 흑백 텔레비전이 있다.

 그 방엔 또 자신의 작은 침대와 하얀색을 칠해 놓은 화장대가 하나 있다. 화장실에선 소독약 냄새가 났다. 오래 된 가스 난로가 있는 볕이 잘 드는 주방, 패랭이꽃과 페리윙클이 핀 화단이 있고, 자그마한 잔디밭에, 삐그덕거리는 나무 대문에는 <푸른 수평선>이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애나는 약간 불안을 느끼며 가죽 안락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커피 한잔 하겠소?"

 그가 벨을 눌러 흰 제복을 입은 늙은 하인을 부르며 물었다.

 "아니면 브랜디를 한잔 들든가?"

 "좋아요."

 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군요."

 그녀는 브랜디를 한잔 마시고 싶었다.

 그가 다가와 의자에 털썩 앉더니 눈을 감았다.

 "마음에 드시오?"

 "뭐가요?"

 "사랑스러운 네누파르 말이오."

 그의 말투는 진짜 여자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아, 이 보트요?"

 "그렇소, 내 보트 말이오."

 "썩 맘에 들지는 않아요."

 그렇게 말한 뒤 그의 반론을 기대했으나 그는 시원스럽게 웃어만 보일 뿐, 그녀의 도전적 태도에 흥미를 느끼는지 아무 말 않고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고만 있다.

 "당신은 매우 고집이 센 숙녀로군."

 "당신도 퍽 아집이 센 편이잖아요?"

 그녀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그는 침착했다.

 "사실 난 내 자신의 방법을 좋아하오."

 그는 그녀의 평가를 인정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마 그 정도는 아닐 거요."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이 보트를 마음에 안 들어하오?"

 "물론 훌륭한 배예요. 하지만 좋아한다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요. 이 배가 대단히 특별한 것이고 당신이 값어치 있는 물건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줄 수 있을 만한 걸 찾아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순백색의 길고 가느다란 줄기를 가진 백합이 화병에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내겐 저런 꽃들이 값비싼 화병보다 더 사랑스러워요. 비록 그 화병이 꽃보다 열 배 이상 값이 나간다 해도 말예요."

 "백 배요."

 그의 이 대답이 우쭐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정확히 가르쳐 주려는 것뿐이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난 인공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인 걸 더 좋아해요. 온실의 난초보다는 미나리아재비 같은 들꽃이 더 좋거든요."

 "당신은 돌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끼오?"

 반쯤 놀리는 말투다.

 "물론이죠."

 그녀는 자기 방의 화장대 위에 놓인 조약돌 그릇을 보면 이 사람은 어떻게 느낄까 하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해변에 가서 모은 것인데 나름대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들이다. 바닷물에 씻겨서 달걀 같은 곡선을 지닌 것도 있고, 푸른빛이 돌거나 대리석 같은 것, 옥색을 띤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무언가를 잃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일종의 바다에 대한 향수 같은 걸까. 들꽃과 마찬가지로 돌들도 자연 그대로 있는 게 훨씬 더 보기 좋은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아니예요."

 애나는 자신이 회상에 잠겨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 고향인 이스트본을 생각했어요."

 "그곳은 어떻소? 나도 좋아할 수 있을 만한 곳이오?"

 애나는 자그마하고 한가한 도시에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어두운 색깔의 벽지를 바른 술집에 앉아 흘러간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파이와 햄이 담긴 상자 옆에 앉아 술을 마시는 크리스티안 카사스라…? 그리고 다시 거리를 걸으며 종이봉지에서 쇠고둥을 꺼내 먹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떠올리자 웃음이 쿡 하고 나왔다.

 "아뇨, 당신한텐 별로 안 어울릴 것 같아요."

 그에 대한 애정 비슷한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좋아해선 안 돼.'

 그녀는 자기자신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난 사람을 미워하는 데는 별로 익숙치 못한 편이니까, 미워하려 해도 어느 새 감정이 지워져 버리고 말잖아? 지금만 해도 어쨌든 무섭기도 하고 밉기도 한 이 사람과 같이 있잖아. 나는 그에게 이끌리고 있고, 그에게서 몇 가지 좋은 인상도 받았어.

 "내가 싫어하는 게 뭐겠소?"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나 역시 미나리아재비를 좋아하는데?"

 "하지만 엿기름과 식초로 양념한 쇠고둥 같은 건 좋아하지 않을걸요?"

 그가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새조개, 젤리를 바른 뱀장어, 신문지에 싼 생선회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난 당신이 캐비어를 즐기는 걸 알아요. 하지만 난 그게 좀 이상해요. 사람들은 그 덤덤한 맛의 캐비어를 정말로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면 그저 그게 비싸니까 먹는 걸까요?"

 "난 캐비어를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오."

 그는 질문을 살짝 피했다.

 "이스트본에 대해서나 더 말해 줘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린 교외에 살고 있어요. 그곳은 서식스 해안에 접한 인기있는 휴양지죠. 휴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황량한 겨울바다는 정말 아름다와요. 난 신발을 벗고 암벽을 기어다니기를 좋아했어요. 근처에 비치헤드라는 높다란 절벽이 있는데 가끔 실연당한 사람들이 거기서 몸을 던지기도 하죠. 경치는 참 좋아요."

 "당신은 그런 생각을 안했었소? 그 사람에게 실연을 당한 후에 말이오."

 "누구 말예요?"

 애나가 놀라며 물었다.

 "점심식사 때 당신이 말했던 사람 말이오. 당신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그 사람에 대해 말한 기억이 없는데요?"

 그런 사람이 있긴 있었다는 대답이 되고 말았다. 포도주로 얼근해진 기분에 함부로 지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딘에 대해서는 분명 얘기한 적이 없다. 낯선 사람과 얘기하기에는 지극히 사적인 화제니까.

 "어쨌든 당신은 말을 했소."

 바로 그때 기억나는 게 있었다. 그가 자신의 비밀스런 일면을 언뜻 보였을 때 나는 <남자는 잔인해질 수 있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벽에 난 구멍으로 정원을 살펴볼 수 있고, 카메라 렌즈로 그 전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듯이 그는 그 얘기 하나로 애나의 슬픈 과거를 상상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따금씩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서 말이오."

 그가 애나를 깨웠다.

 "미안해요."

 자세를 가다듬으며 애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하인이 다시 와서 내는 찻잔 딸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 그녀는 둘 사이에 생긴 어렴풋한 친밀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브랜디를 받아들고 흔들리는 잔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난 곧 가야 해요."

 "곧?"

 "네, 곧. 오늘 저녁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주점 일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표현했지만 그에게 주점을 언급하는 건 어색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날 때 바래다 주겠소."

 "무척 친절하시군요. 당신도 저녁에 할 일이 있나요?"

 알고 싶다. 물론 <일>이란 단어가 그에게는 맞지 않겠지. 빨리 처리해, 조정해 봐, 감시해― 이런 말들이 더 어울릴 거야.

 "난 둘시네아에 있을 거요."

 그것은 한가로운 노동을 의미한다. 애나는 그가 야회복을 입고 주위를 돌며 몇몇 손님들과 앉아 스카치 두 잔과 포도주 한 잔 정도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난 레스토랑이나 클럽을 운영하는 걸 취미만큼이나 즐기는 편이오."

 그는 거기서 돈을 벌어들이는 게 주목적이 아닌 모양이다. 애나는 가슴속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토니와 테사의 몸부림이 생각났다. 왜 그들이 독립해서 힘껏 살아보게 내버려 두지 않는 걸까? 그들이 그 보잘것없는 주점을 어디서 어떻게 경영하든 그가 그렇게까지 훼방을 놓을 이유는 없을 텐데.

 "취미가 뭐요, 미스 던?"

 그녀는 짧은 생애 동안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많이 겪어왔다. 이 학교로 갈까, 저 학교로 갈까?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나… 취미가 뭐냐고? 잠시 한숨이 나왔다. 그런 단어는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었다. 생계에 쪼들리는 자신에겐 사치스럽고 하찮은 소리다.

 그저 지루한 주말이면 망상과 고독에 매이지 않기 위해서 가끔 수영이나 테니스를 즐기는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책도 읽고 양재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취미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단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의 일부분일 뿐이다. 물론 거기에는 음악도 있고 처녀가 꿈꾸는 세계도 들어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일상적인 생활의 한 단편일 뿐인 것이다.

 애나는 그런 허상적인 단어들을 자신의 삶 속에 포함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과는 무관한 공간에 그 사치스런 단어를 처박아 두고 있었다.

 요리? 체스? 금속세공? 매듭공예? 성냥개비로 큰 돛대의 모형을 만드느라 몇 년을 허비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자신에겐 모두가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한숨을 쉬며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나오는 그녀에게 시험감독관이나 회사의 채용담당자는 알 수 없는 아가씨라는 듯 고개를 내젓곤 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가슴을 이해해 줄줄 몰랐다.

 그러나 애나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잃어본 적은 없었다.

 "취미가 없어요."

 "그럼 당신의 직업은? 스페인에 오기 전에 뭘했소?"

 "건축회사에서 비서로 일했어요."

 애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왜, 맘에 안 들었던 모양이죠?"

 "네 별로. 있고 싶지 않았어요."

 사실 그 직장은 실망만 안겨 주었다. 회사 일에 몰두하면서 회사가 잘 운영되고 자신이 꼭 필요한 구성원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는 회사가 전망있어 보이지 않았다. 회사의 상급자들은 그녀가 사무실에서 근무하기보다는 우아한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고객담당의 창구를 맡아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회사에 이로울 것이라 판단하고는 그렇게 결정해 버렸다.

 "근무하고 싶지 않았소?"

 "계속 있을 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스페인에 오기로 했군?"

 "네."

 "왜 그렇게 했소?"

 애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로 상대방을 탐색하려 애쓰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한 침묵이다. 이따금씩 서로의 대화에서 친밀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확인되는 건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뿐이다. 떠돌던 이방인들끼리 길가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나누고 다시 서로의 길로 헤어져 가는 듯한 느낌이다.

 그의 모든 점이 나쁜 건 아니야. 애나는 그의 무감각한 얼굴과 굳어 있는 표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표정이나 태도도 아주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의 손은 그의 뜻을 거역했다. 무의식적인 제스처로 감정의 본질과 깊이를 묘사함으로써 그의 감춘 가슴을 대신 나타내 주는 것이다.

 아집 덩어리,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 테사는 그를 이렇게 지칭했다. 의심할 바 없이 테사의 묘사는 적절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그에게도 좋은 심정이 엿보이는 것이다.

 "이젠 정말 가봐야겠어요."

 둘 사이가 어색한 분위기로 싸이기 전에 가야겠다고 느끼면서 애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저…"

 그녀는 말을 꺼냈으나 맺지를 못했다. 이따금 그렇게 그녀의 말은 궤도를 벗어나 어디를 향하는 건지 산만해지곤 한다.

 "덕분에 유쾌했소."

 그는 그녀의 명확하지 않은 말을 끝맺었다. 카사스는 일어나서 자동차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갑판에 오르자 오후의 햇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애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푸른 눈이 갈색 눈보다 빛에 더 민감하다고 했던 책에서의 한 귀절을 생각해냈다. 크리스티안은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콧등에 맞췄다.

 그들은 해안의 산책로를 따라 걸어나왔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았고 애나는 상점들을 보면서 얘기했다.

 그는 차를 그늘에 주차했었는데 햇빛은 벌써 빌딩 위를 기어올라 지붕을 비추고 있고 그늘 쪽은 약간 어둑해져 있다. 카사스는 부르릉거리는 소음을 내며 차의 시동을 건 뒤 문을 열어 주었다. 차 안은 무척 더웠다. 크리스티안이 창문을 열었다.

 "좀 달리면 시원해질 거요."

 고속도로로 나와서는 차를 빠르게 몰기 시작했는데 애나는 다른 차들을 앞설 때까지도 속도감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차들은 마치 뒤로 달리는 것 같았다. 속도계를 보니 시속 l60km로 달리고 있었다. 속도계의 눈금은 계속 올라갔다. 그녀는 점점 안절부절못했다.

 드라이브는 곧 끝났다. 그는 빌라 앞에 차를 세우고는 백미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점심 같이해 줘서 고마왔소."

 "저도 즐거웠어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가 다시 데이트 약속을 하지 않으리란 걸 감지하고 나니 약간 초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다음에 봬요."

 그녀가 먼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이젠 어떻게 하지? 악수를 하나? 애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또 만나게 되기를 기대하겠소."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는 나를 얼간이로 생각하겠지. 아주 못난이 취급을 할 거야. 그녀는 점점 더 속이 상했다.

 "좀더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기를 바라오."

 그의 말은 그녀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글쎄요…"

 그녀는 아직도 비참한 기분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차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디뎠다.

 "걱정하지 말아요, 빌…"

 그가 뭐라고 얘기하려는데 애나가 문을 꽝 닫는 바람에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가능한 한 도도한 걸음걸이로 걸으면서 그의 말을 떠올렸다. 빌랄바 일에 대해 걱정 말라고 한 걸까?


                   3



 "경치가 정말 좋군요."

 밝고 순수한 얼굴에 키가 훤칠하게 큰 청년이 어깨에 햇빛을 받으며 말했다. 그는 푸른빛이 도는 셔츠와 새 옷처럼 뻣뻣하고 산뜻한 진을 입고 있는데, 붙임성있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다. 휴가를 즐기려고 스페인까지 온 그의 눈에는 주변의 모든 것이 신기해 뵈는 모양이다.

 그는 지금 자기가 캠프를 치고 있는 장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기는 파도 소리가 잔잔히 들리고 높다란 소나무가 향내를 풍기는 곳이라고 한다. 작은 텐트를 치고 슬리핑백을 깐 다음, 가스버너로 캠핑용 주전자에 차를 끓여 마시면서 제법 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온 지 이틀 됐고, 3주 정도 지낼 건데 그동안 지도를 안내삼아 시에라의 굴곡이 심한 낮은 경사지를 탐험할 예정이라고 한다. 저녁이면 주점으로 놀러오곤 하는데 비싸지 않은 음식 값과 소탈한 분위기, 무엇보다도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게 맘에 드는 모양이다.

 키가 약 l90cm나 되는데 이름은 묘하게도 마틴 쇼트다. 그는 애나에게 두툼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스스럼없이 자기에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대면서. 아마 그 이름 때문에 자기보다 키 작은 친구들에게 난쟁이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도 그런 짓궂은 장난을 건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꾹 참았다.

 나이가 24살이나 되고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지만 그는 영원한 학생 같은, 마치 조숙한 보이스카우트 대원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머리에 스카우트 모자를 쓰고 짧은 반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그에게 보이스카우트 경례를 해보고 싶은 장난기를 억제하며 애나는 같이 손을 내밀어 그를 환영해 주었다. 금방 친숙한 기분이 들었지만 짓궂게 굴지는 않았다.

 주점에 찾아온 그와 농담을 나누다가 주방으로 통하는 문가에 테사가 서 있는 걸 흘끗 보았다. 테사는 두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있는데 입가에는 어머니다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통로 가운데쯤에서 있는 그녀는 배가 부르고 등이 약간 뒤로 젖혀진 상태다. 꽃처럼 화사한 분위기에 어딘지 어른스런 기품이 어려 보인다.

 애나와 눈이 마주치자 테사는 등대불처럼 강렬한 눈빛을 보냈다. 애나는 약간 움찔하며 속으로 얕은 신음을 토했다.

 "오, 저런!"

 테사는 내가 지금 뭔가 수작을 부리는 줄 아는 모양이지?

 그것은 테사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테사는 애나가 친절하고 단정하고, 그리고 독립심도 강한 남자를 만나 정착하기를 바라고 있다. 애나가 더 이상 크리스티안 카사스와 데이트를 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을 때, 테사는 무척 반가와했다.

 테사는 동생이 딘이나 카사스 같은 남자와 위험스런 관계를 지속할까 봐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동생에게 바라는 건 평범하고 자상한 사람과 결혼해서 순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애나가 카사스와 같이 있었던 일을 자세히 얘기하자 테사는 다정한 목소리로 토닥여 주었다.

 "이젠 별일 없을 거야."

 "그래, 별 나쁜 일은 없을 거야."

 애나는 동의하면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별로 좋은 일도 없겠지."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말투에 담긴,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어조가 눈치채이지 않기를 바랐다. 자기의 속마음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게 속상했다. 사실 그녀는 일주일 전부터 왠지 모를 아쉬움에 잠겨 있었다. 이따금 홀로 사색에 빠질 때면 금광을 찾아나선 사람 같은 진지한 분위기와 무언가 애수를 담고 있는 눈빛을 지닌 카사스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레 생각이 나는 것이다. 이런 기분을 뭐라 할까? 그가 남기고 간 빈 자리 때문에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공허하다. 단지 가망없는 공상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물거품으로 끝나게 마련인 그런 공상을. 그러나 후회해도 이미 소용없는 일이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왜 좀더 세련되게 대하지 못했을까? 나는 누구에겐가 기대고 싶다. 하지만 과연 누구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올리고 입술을 오므려 키스를 받고 싶어하는 자신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난 얼마나 바보인가? 그러나 더 심한 것은… 마침내 그의 입술은 받아들이는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어쩌다가 꿈속에서 딘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딘이 아니라 바로 크리스티안이었다.

 교활하고 사악한 허풍쟁이! 그를 경멸할 만한 이유를 찾아서 그를 미워하려고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속마음은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

 "저, 시내 구경을 하지 않겠어요?"

 마틴이 물었다.

 "아, 미안해요."

 애나는 웃으면서 사과했다.

 "딴 생각에 빠졌었어요."

 크리스티안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신은 꿈꾸는 듯한 표정을 가지고 있소."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아아, 하느님, 잊어버리게 해주세요.

 "나는요."

 마틴이 참을성있게 다시 말을 이었다.

 "식량을 사러 나가야 하거든요. 나가는 길에 한 바퀴 돌고 오려고요."

 "그럼 함께 가도록 해요, 아무 때나. 아침 나절이면 돼요."

 애나가 승낙했다. 우정의 표시인지 마음이 넓어선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기적인 생각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응낙했다.

 "이거,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마틴은 그녀를 보며 밝게 웃었다. 그는 순수한 가슴을 지녔고, 친구와 함께 있는 걸 행복해하는 따스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애나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수요일쯤 가기로 하고… 자, 맥주를 들어요. 스페인 어로는 <세르베자>라고 해요."

 자신의 짧은 실력으로 그에게 스페인 어를 몇 개 가르쳐 주었다.

 "감사합니다, 건배!"

 수요일 아침, 약속시간에 맞춰 마틴 쇼트가 왔다.

 "들어와서 커피 한잔 하세요."

 테사는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들은 막 식사를 끝낸 참이어서 식탁에는 빵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애나가 인사했다.

 토니는 스페인 어로 인사를 하며 맞았다.

 "홀라!"

 "예, 안녕하셨습니까?"

 크게 제스처를 하며 마틴이 손을 비볐다.

 "외출하기에 딱 좋은 날씹니다."

 그는 생동감에 넘쳐 있다. 해안의 신선한 공기와 햇빛, 그리고 휴식이 그런 약동하는 젊음을 더욱더 빛나게 하는 모양이다. 머리카락은 훨씬 더 노란 금빛이 됐고, 피부는 알맞게 그을려 보기에 좋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다. 더 이상의 매력은 느낄 수가 없다.

 애나는 그것이 아마도 자신의 편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모든 걸 받아들인다. 마틴 쇼트는 육감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수수하고 악의없는 인상이다. 보기 좋은 얼굴이고 이목구비도 비교적 준수하지만 그 정도일 뿐이다. 적어도 애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바로 그때 딘에게 받았던 고통이 얼마쯤 이해되었다. 자신은 딘에게 너무 과장된 연기를 했던 것이다. 사랑놀이라는 카드게임에서 마치 자기가 에이스를 쥐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카드를 보았을 때 자신의 허풍은 여지없이 폭로되고 말았던 것이다.

 애나는 자신이 매우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하며 진취적인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겉모습에는 보수적인 조심성이 묻어 있다. 그리고 딘은 부드럽고 친절한 성품이 아니고 정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다. 또한 자신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결점투성이였고 서로간에 믿음이 없었다. 애나는 그 아픈 추억에서 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이 교훈을 깨닫게 된 것이다.

 "뭣 좀 안 드시겠어요?"

 테사는 좀 고집스런 여동생의 구혼자가 될지도 모를 마틴의 주위를 분주히 오가고 있다. 애나는 언니가 능청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별로 신경쓸 일은 아니다.

 "벌써 아침을 먹었는걸요."

 "그럼, 우리 나갈까요?"

 애나는 마틴에게 말하고 나서 언니를 쳐다보며 늦지 않게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아냐, 괜찮아. 너무 급하게 돌아올 건 없어."

 테사는 그들을 배웅하러 차를 세워 둔 곳까지 따라나왔다.

 "가게 문 열 때까지는 돌아올게."

 애나는 차에 올라타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걱정 말라고. 어디가서 점심이라도 함께 하고 와. 하루 종일 놀다 와도 돼."

 테사는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애나는 테사의 그런 태도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아냐, 와서 일을 돕겠어."

 애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시내는 제법 북적거렸다. 그들은 유쾌하게 말을 주고받으며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마틴은 스페인 사람들과 얘기할 때 매우 느리고 큰 목소리로 손짓발짓을 해가면서 설명을 해야 했다. 상점 주인들 중에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가끔은 서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경우도 있었다.

 철물점에 갔을 때는 밖에서 그를 기다리면서 진열창을 통해 그가 깡통따개와 플라스틱 식기를 사면서 마치 군대의 수신호를 하듯 열정적으로 제스처를 쓰는 것도 보았다.

 "자, 이젠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 들까요?"

 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좋아요."

 두 사람은 길가 카페로 가서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날이 무척 뜨거워질 거예요."

 "어, 그래요?"

 "이 집에서는 즉석 오렌지 주스를 팔아요."

 애나가 설명했다.

 "꽤 신선한데 한 잔 마셔 볼래요?"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는 양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그리고 나선 그만 돌아가요."

 "그러죠."

 그는 의자에 앉아서 두 다리를 벌린 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그녀는 옆자리 사람들이 자기들을 멋진 한 쌍― 둘 다 금발에다 피부가 곱게 그을은― 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제멋대로들 추측하도록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연인들을 대하는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웨이터가 다가왔다. 애나는 음료수를 주문하고 나서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아주 가까이서 스웨덴 제의 빨간 스포츠카가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운전석에는 바로 크리스티안이 앉아 있다. 그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차를 몰면서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을 때 그의 안경테가 번쩍 하고 빛나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흠칫 놀라 못 본 체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에는 뭘하실 작정이죠?"

 그녀는 마틴에게 말을 건네면서 자기의 말투가 예사롭게 들리게 하려고 애썼으나 목소리는 이미 흥분되어 있다.

 "아 예, 별것 없어요.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산책이나 하다가 나중에 주점에 들르겠습니다. 당신은요?"

 "저는 해변가로 가서 좀 쉬고 싶어요."

 그녀는 정말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답답한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녀는 오후에 빌라를 나와 해변가로 통하는 작은 모래길을 따라 걸었다. 바다감탕나무 숲을 지나자 삐죽삐죽한 바위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 나왔다.

 "별로 모래가 곱지 않네."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자갈 섞인 모래를 한 줌 쥐어올려 손가락 사이로 흘렸다. 앉아 있는 곳은 한적하지만 경치가 좋은 곳은 못되었다. 맑지 않은 바닷물이 해안으로 밀려와서는 여기저기 검은 해초를 뿌려 놓았고, 물가에는 햇볕에 말리려는 정어리가 널려 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으므로 숲과 파라솔, 그리고 줄무늬 일광욕 의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호텔의 야외 수영장보다는 좋았다. 여기서 홀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그녀는 시원스럽게 바지와 티셔츠를 벗어던졌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옷을 입고 벗는 것마저도 귀찮은 일이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비키니 차림으로 책을 펴놓고 엎드렸다.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그녀는 손을 등으로 돌려서 수영복 고리를 풀어 버렸다. 사람들의 세계가 멀어지고, 마치 자신이 무인도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책에 싫증이 났다. 펼쳐진 책장에서는 환한 흰 바탕 위에 글자들이 개미군단처럼 스물거렸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나직한 바닷물 소리를 듣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안녕."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올린 크리스티안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애나는 무의식적으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벌떡 일어서려다가 자신이 반라인 것을 깨닫고는 어쩔 수 없이 엎드린 채 고개만 들어 그를 보았다. 마치 물개의 포즈를 취한 것처럼 어색한 자세다. 그녀가 손가락을 더듬어 수영복의 고리를 찾아 잠그려고 하자 크리스티안이 그녀의 서툰 동작을 보고 웃었다.

 "도와 드리지."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수영복의 고리를 채워 주었다. 애나는 가볍게 스치는 그의 손끝을 피부에 느끼면서 자신의 속마음이 얼굴 표정에 드러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다.

 "자, 됐소."

 그가 말했다.

 "고마와요."

 그녀는 앞가슴을 여미면서 일어나 앉아 그를 마주보았다. 마치 발가벗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 앞에서 이렇게 거의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있어 보기는 처음이다. 갑자기 자신의 긴 다리와 팔, 그리고 균형잡힌 몸매가 한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인 방어자세로 그녀는 무릎을 세워 팔로 감싸안았다. 그러면서 애써 태연한 척하느라고 그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그는 옆에 앉아 책을 집어들었다.

 "읽을 만하오?"

 "언니 건데 썩 좋은 건 아녜요."

 크리스티안은 몇 줄 읽어보더니 책을 옆으로 가볍게 던졌다.

 "음, 당신에겐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소."

 "그런 것 같아요."

 자신의 무릎에 턱을 괴고 애나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지브롤터는 오늘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자주 오는 편이오?"

 그가 물었다.

 그녀는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뭐가 우습소?"

 "아, 아니예요. 그냥 웃음이 나와서요. 일종의 습관인데요. 누구하고 편안히 얘기를 할 때면 기분이 가벼워져서 웃음이 나와요."

 그녀는 웃음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자기가 교태를 부리는 줄로 착각할까 봐서다.

 "그런 말은 처음이오."

 그는 진지하게 대답하며 섬세하고 기다란 손으로 모래를 매만지더니 애나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그의 무릎이 살짝 부딪치면서 그가 입은 셔츠의 보드라운 촉감이 그녀의 허벅지를 스쳤다.

 "난 지금 당신이 이곳에 자주 오느냐고 묻고 있는 거요."

 그가 가까이 있다는 게 별로 싫지 않다. 그녀는 어쩐지 말을 조리있게 하기가 힘들었다.

 "그냥 가끔 들러요. 혼자 있고 싶을 때는요."

 "당신은 종종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소?"

 그녀의 말은 완곡한 의미에서의 자리를 비켜 달라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그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자주는 아녜요."

 그가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순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으므로 그녀는 다시 한번 그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검은 눈빛이 찌르듯이 다가와 그녀는 약간 당황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긴장을 풀고 싶으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몸이 굳어져 버린 것 같다. 딘과 함께 있을 때도 가끔 이런 쑥스러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데 어쩐지 자꾸만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은요?"

 그녀는 알고 싶었다.

 "당신도 여기 자주 오세요?"

 "산책을 하고 싶을 때면 가끔씩…"

 순간 그녀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해변을 산책하려는 옷차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차림새는 평상복이지만 정장에 가까운 값비싼 옷차림이어서 모래밭 위에서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혹시…

 그럴 리가 없지. 이 남자가 무슨 이유로 날 만나러 이곳까지 오겠어?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부인했다. 정말일까? 하지만 어떻게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알았을까?

 "오늘 아침 당신을 보았소… 시내에서."

 그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래요? 어디서요? 저는 당신을 못 봤는데요."

 물론 거짓말이다. 그러나 애나는 자기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마음이 불안정했으므로 그의 눈을 피해 겨우 멍든 자국이 있는 왼쪽 눈밑을 쳐다보았을 뿐이다.

 "내가 봤을 때 당신은 어떤 사람과 함께 있더군. 당신 남자친구요?"

 그는 가벼운 어조로 물었으나 평범한 말투는 아니다.

 "마틴과 함께 있었어요."

 그가 원하는 대답을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그녀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갑자기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그 사람… 남자친굽니까?"

 그가 재차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글쎄요, 남자친구라고 말할 수는… 아녜요, 말하고 싶지 않아요."

 좀 미묘한 대답이다. 그렇지만 달리 뭐라고 대답할 수가 있을까?

 크리스티안은 약간 메마른 소리를 냈다. 한숨까지는 아니지만 낮은 신음소리라고나 할까?

 그녀는 그가 일어나 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떠나지 않도록 불쑥, '사실은 그를 거의 몰라요. 단지 친구일 뿐예요. 그리고 그는 제게 별로 어울리는 타입이 아니죠'라고 말할 뻔했지만 겨우 그 말을 참았다.

 "영국인이오?"

 "네, 그래요."

 그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애나는 다정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턱과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그를 처음 봤을 때 느낀 신경질적이고 화난 것 같은 기색이 감돈다. 그에게 조심스러워지는 이유는 그가 얕잡아 볼 수 없는, 어느 정도는 두려운 사람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딘은 이따금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고 다른 운전사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주차표를 찢어 버리기도 했다. 또 식당에서 음식이 마땅찮으면 요리를 되물리기도 했다. 반면에 카사스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일단 화를 냈다 하면 홍수처럼 휘몰아칠 사람이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저것 좀 보세요, 멋지지 않아요?"

 그녀는 화제를 바꿨다. 그러면서 미풍을 타고 푸른 돛을 한껏 부풀린 채 바다 가운데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윈드서핑 보트를 가리켰다.

 "멋지군."

 그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도 해보고 싶어요. 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무엇이든지 불가능한 일로 얘기해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오."

 그는 힘주어 말했다.

 "시도해 보기 전까지는 말이오. 그것은 가장 패배적인 태도요.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적어도 당신이 그렇지 않다고 깨닫기 전까지는."

 그는 질투를 하고 있는 걸까? 여전히 마틴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면서? 화제가 마틴 얘기로 바뀌기 전까지 그의 태도는 밝고 상냥했었다.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능력을 솔직히 인정하는 게 왜 나쁘죠?"

 그녀는 따지듯 반문했다.

 "나는 균형감각이 없어요. 신체적으로도 강건하지 못하고요. 그래서 윈드서핑을 잘 못할 것 같다는 건데."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는 논쟁에 지친 사람처럼 쉽게 양보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들은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애나는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원을 그리기도 했고 손을 오므려서 모래를 퍼내면서 모래 구멍의 양쪽이 자꾸 함몰되는 모양을 바라보기도 했다.

 "당신 보트는 어떻게 됐어요?"

 그녀는 지나치는 말투로 물었다.

 "네누파르?"

 그는 그 이름에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은 괜찮소."

 "수리는 다 끝냈나요?"

 "물론."

 "참 잘됐군요."

 "다음주 토요일에 배 위에서 파티가 있소. 당신이 와주면 좋겠는데…"

 역시 카사스답다. 나는 당신이 꼭 거기에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당신은 그곳에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라고는 말할 수 없는 걸까? 애나는 미간을 찡긋했다. 파티라고? 어떤 사람들이 오는 걸까?

 "어떻소?"

 그가 확답을 구하듯 물었다.

 "저… 가고 싶긴 하지만 토요일은 너무 바빠요."

 "당신이 없어도 그들은 잘 해나갈 거요."

 "글쎄,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갈피를 못 잡았다.

 그의 제안은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주었다. 간다고 해도 거기 모이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스페인 어로 얘기를 주고받을 텐데…

 "당신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는 사실에 대해선 걱정 말아요."

 그는 마치 그녀의 마음을 훤히 읽은 듯이 말했다.

 "몇몇 친구들과 품위있는 사람들만이 모일 테니까. 아니면…"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신 친구를 데려와도 좋아요."

 "내 친구라고요?"

 애나는 당황한 듯이 되물었다.

 "왜 그 마틴이라는 사람 말이오."

 "아, 마틴…"

 그녀는 가만히 생각에 잠기며 어떤 장면을 떠올려 봤다.

 자기와 마틴이 함께 서 있는데 마틴이 제스처를 써가며 우스꽝스럽게 장사꾼 같은 말투로 지껄여대기 시작하고 모든 시선이 자기들에게 집중되며 몇몇은 경멸의 눈초리를 숨기려고 돌아서 있는 그런 장면이다.

 "아, 아니예요. 그와 함께 가느니 차라리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크리스티안의 눈빛이 갑자기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가 원하던 대답을 해준 것이다. 이제 그가 질투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자신과 함께 있었던 남자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애나는 확인한 셈이다. 자기의 말투 속에 자신들의 사이가 그저 평범한 관계라는 사실을 은근히 풍겼던 것이다.

 "당신을 마중하러 사람을 보내겠소."

 그가 일어서서 바지의 모래를 털며 말했다. 그가 일어서자 그는 마치 그녀를 내려다보는 석탑처럼 거대해 보였다.

 "내가 직접 갈 수는 없지만 차는 보내겠소."

 "저도 차를 몰 수 있어요."

 그녀는 항의하듯 말했다.

 "그리고 꼭 가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매우 어려울 거예요. 토니와 테사에게 동의를 구해야 하니까."

 "그들끼리도 잘할 수 있을 거요. 주점이 그리 크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바빠요."

 속으로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손님이 꽤 많거든요."

 "그렇다면 당신 대신 누구 한 사람 세워 두면 되잖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아무튼 8시에 사람을 보내겠소."

 그는 얇은 스웨터 소매를 신경질적으로 접어올렸다.

 "난 그만 가보겠소."

 "그러세요."

 "그럼, 파티에 오는 걸로 알겠소."

 "네, 가겠어요, 괜찮으시다면."

 "좋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가볍게 들어보이고는 휙 돌아서서 걸어갔다.

 모래 위를 걷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그가 무엇 때문에 오후에 해변가로 나왔을까 궁금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산책을 하러 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4



 촉감이 참 좋은데… 애나는 옷감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자기 몸을 쓰다듬어 보았다. 등에 가죽끈이 달린 연분홍 실크 드레스다.

 그 옷은 여지껏 가져본 옷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것이다. 가게에서 그 옷을 입어보는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옷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 옷의 임자는 바로 자기밖에는 없을 거라는 직감과 함께.

 크리스티안의 파티에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걱정이었다. 눈에 띄게 화려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초라한 것도 곤란하다. 애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언제든지 주목을 받는 편이다. 또한 그러한 시선들을 음미하곤 했다. 자신의 모습에 만족할 때는 즐거웠고, 뭔가 미진한 구석이 느껴지면 위축되곤 하는 것이다.

 초저녁 노을이 그녀의 방을 붉게 물들이면서 마루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 놓았다. 그녀는 거울울 들여다보며 얼굴을 매만졌다.

 방금 감은 머리가 좁다란 어깨 위로 싱그럽게 늘어져 있다. 두 손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등으로 넘겼다. 거울 속에 비친 늘씬한 금발의 여인은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돌아서서 어깨 너머로 등을 비춰 보았다. 드레스의 둥글게 팬 선과 예쁘게 묶인 가죽끈을 감상해 보기 위해.

 "들어가도 되니?"

 테사가 이미 문을 들어서며 말했다.

 "응, 저…"

 애나는 나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기분으로 화장을 하는 척했다.

 테사는 막 다림질을 끝낸 모양인지 팔에 산뜻하게 접은 시트를 들고 있다. 그녀가 다리미를 쾅 하고 내려놓던 소리와 네모나게 각이 진 그녀의 어깨가 애나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걸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녀는 애나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언니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괜찮아."

 테사는 짧게 대답하고는 서랍에 시트를 개켜 넣었다.

 "가지 말까?"

 애나는 테사가 가지 말라고는 하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넌지시 운을 떼봤다. 처음 크리스티안의 파티에 초대받았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테사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보 같은 소리 마."

 테사는 서둘러 서랍을 닫으려 했으나 잘 닫히지 않는지 손잡이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어대며 말했다.

 "언니가 바쁠 것 같아서 그래. 정말 걱정이 된단 말야."

 "괜찮아, 우리 둘이 잘할 수 있어."

 "잘할 줄은 알아. 하지만…"

 "아냐, 가도 돼. 가서 즐겁게 놀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둘 사이에 언급되지 않았다. 한창 바쁜 날 애나가 외출을 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가령 마틴 쇼트가 애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하는 거라면 테사는 기꺼이 허락을 했을 거고 오히려 반가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마틴과 외출하는 게 아니고 크리스티안의 선상 파티에 가려는 것이다.

 "그 사람을 해변에서 만났어."

 애나는 설명했다.

 "아주 우연히."

 하지만 둘이서 무슨 비밀스런 약속을 한 게 아닌가 해서 차가운 불신의 표정을 짓고 있는 테사를 보니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날 파티에 초대한 거야. 믿지?"

 "그래? 잘됐구나."

 "글쎄,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어."

 애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아 테사에게 애원의 눈길을 보냈다.

 "제발 이번 일로 토라지지 마, 언니."

 "난 아무렇지도 않아."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속마음은 토라져 있잖아?"

 "그래."

 테사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왜 꼭 거기를 가려는지 모르겠어. 사실 안 갔으면 해. 난 네 앞날이 걱정이 돼서 그래."

 테사는 머리를 흔들었다.

 "너 그 사람에게 빠진 거니?"

 "그건 아냐."

 "그럼 뭐니?"

 "나도… 나도 잘 모르겠어."

 애나는 자신이 솔직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감정이 혼란스럽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자신이 크리스티안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

 "글쎄… 하여간 너는 우울해 뵈지는 않는구나."

 테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애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걱정 말고 즐겁게 보내렴. 하지만 처신은 잘해야 된다. 난 카사스란 사람을 도무지 모르겠어."

 "아마 그 사람은 무언가 결심을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아. 언니나 형부에게도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내려고 할 거야."

 "천만에! 그 사람은 안 그럴걸."

 "왜?"

 "사실 난 그 사람이 찾아와서 뭐라고 말을 하는 것보다, 그냥 말없이 앉아 있는 게 더 두려웠어. 아마 지금도 계략을 짜내고 있을 거야. 뭔가 아주 고약한 계획을 말이지."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애나는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언니 말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진 않아. 그건 다만 겉모습일 뿐이야. 그도 좋은 점을 지니고 있어."

 테사는 아무 말 없이 불안하게 애나를 쳐다보았다.

 "준비를 마저 끝내야겠어. 곧 기사가 데리러 올 거야."

 "그래라, 난 토니를 거들러 주점엘 나가봐야겠다."

 테사가 나가자 애나는 서둘러 팔찌를 고르고 흰 구두를 꺼냈다. 그리고는 귀걸이를 고르다가 흥분되어 진주 장식을 떨어뜨렸다. 만약 크리스티안이 차를 보내는 걸 잊는다면? 그러면 얼마나 우습게 될까! 혹은 파티장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면? 초청을 거절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걸. 도대체 파티 따위가 이렇게 조바심을 내며 걱정을 해야 할 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걸까?

 날카로운 현관의 노크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왔구나! 그녀는 재빨리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본 후 솔을 걸치고 문으로 갔다.

 "미스 던이십니까?"

 건장한 남자가 문간에 서서 물었다.

 잘 차려입었지만 어딘가 불량기가 있어 보인다. 그는 크리스티안에게 고용돼 있는 나이트클럽 경비원 중 하나일 것이다.

 "네, 맞아요."

 "준비 다 되셨습니까?"

 "네."

 그녀는 그를 따라 길에 세워둔 세단으로 갔다. 작은 주점에서는 음악과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황혼 속에서 불빛이 반짝거리고 있다. 아, 얼마나 멋진 곳인가! 한순간 핑계를 대고 파티를 거절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벌써 자동차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와요."

 그녀는 머뭇머뭇 차에 올라타면서 예의를 차렸다.

 차가 항구 입구 쪽에 다다르자 멀리서 현란한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곧 상쾌한 저녁 공기를 타고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애나는 긴장으로 손에 땀이 배었다.

 "대단한 파티인가 봐요?"

 옷깃을 만지며 물었다.

 운전사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고는 눈에 익은 페라리와 벤츠 사이로 차를 몰아넣었다.

 "고마와요."

 애나는 차에서 내렸다.

 "이리 따라오시죠."

 요트 위로 올라가서 다시 층계를 내려가니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선실로 안내되었다. 거기엔 약 3, 40명의 남녀들이 모두 우아하게 차려입고 모여 있었다.

 그런데 어쩌지? 여기 이렇게 밤새 서 있을 수도 없고, 아무에게나 가서 영어로 말을 걸 수도 없고…

 그녀는 당황해서 그 장소를 벗어나려고 했다. 바로 그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애나, 여기 있었군!"

 크리스티안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가와서 그녀를 마치 오랜 친구처럼 맞았다. 그는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그를 보자 기뻤다. 어쩔 줄 모르던 낯선 상황에서 자기를 반겨 주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고마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살며시 포옹하며 양볼에 키스를 했다.

 "이리 와요,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게. 샴페인 한잔 하겠소?"

 "네, 좋아요."

 크리스티안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어 웨이트레스를 불렀다. 파마 머리에 까무잡잡한 피부색을 가진 집시 풍의 소녀였다. 그는 쟁반에서 술잔을 집어 애나에게 건네주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태도는 아무리 봐도 위선적인 친절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웃음에서도 가식은 찾아볼 수는 없다.

 "내 좋은 친구 레오폴드를 소개하겠소."

 그는 60살 가량의 옆머리가 희끗한, 유머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호의적인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만나뵙게 돼서 반가와요."

 "당신이 미스 던이시군요."

 레오폴드가 말했다.

 "크리스티안이 나더러 자기를 위해 당신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더군요.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고 있을 때 당신을 보살펴 주라고요. 당신이 스페인 어를 거의 못하니까 나더러 통역을 해주라고 했지요. 이제 당신을 보니 알겠어요. 그 친구는 당신을 다른 젊은이들로부터 지켜 주기를 바랐던 거군요."

 "그 점에 있어선 염려 마세요. 스스로도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미 다른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크리스티안을 살짝 흘겨봤다.

 "하지만 통역을 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저는 스페인 어를 못할 때마다 꼭 바보가 된 느낌이거든요."

 "바보 같다고 느낄 필요는 없어요. 언어란 매우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하룻밤에 숙달될 수는 없는 거지요."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전 참을성이 없거든요. 기다리는 게 싫어요. 바로 어제까지 다 배워 놨더라면 하고 생각해요."

 "그건 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젊을 땐 늘 조급하게 행동하지요. 나이가 들어서야 여행중의 기쁨을 만끽할 줄 알고 목적지에 언제 도착하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말을 못 알아들으면 꼭 손해 보는 느낌이 들어서 너무 속상해요."

 애나가 샴페인을 다 마시자 레오폴드가 지나가는 웨이트레스에게서 한 잔 더 집어 주었다. 그도 역시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도취돼 있는 것 같다.

 "아, 지금 음악은 느린 것이로군. 하지만 좀 있으면 디스코가 나올 거예요. 그러면 애나, 당신도 날 위해 해줄 게 있어요. 내가 당신에게 통역을 도와 주듯이 당신은 내게 춤을 가르쳐 줘요. 난 춤에 워낙 재주가 없어서."

 "그래요?"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의 잘 닦인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가르쳐 드릴게요. 디스코가 준비돼 있는 줄은 몰랐어요. 재미있겠는데요?"

 갑자기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했다. 돌아보니 매우 아름다운 스페인 여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가 가냘픈 어깨 위에 단정히 늘어져 있다. 도도한 모습이다. 잘생긴 코가 곧게 뻗어 있고 날개 같은 긴 속눈썹은 맑은 눈을 감싸고 있다. 그녀는 우아한 몸매에 착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자신있게 걸어들어왔다.

 "누구죠?"

 애나는 큰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레오폴드 역시 새로 온 손님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레오폴드가 돌아서며 사과하듯 물었다.

 "뭐라고 하셨죠?"

 "아니, 아무것도 아니예요. 됐어요."

 애나는 샴페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다소 취기가 돌면서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뱃속이 약간 울렁거렸다.

 누가 팔꿈치를 건드려서 돌아보았더니 크리스티안이 뒤에 서 있었다.

 "애나, 괜찮소? 레오폴드가 잘 돌봐 주오?"

 "네, 그럼요."

 크리스티안은 흰 재킷과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 차림으로 아주 멋져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소개하겠소."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이리저리 다니며 인사말을 통역해 주었다. 이윽고 그 아름다운 스페인 여인에게 다가갔다.

 "이 사람은 아수세나 알바레스요. 아수세나, 내 좋은 친구 애나 던을 소개하겠소."

 아수세나는 가까이서 봐도 역시 아름답다. 맑고 깨끗한 피부에 완벽한 미모를 갖고 있다.

 얼마쯤 도도한 태도로 그녀는 부드럽고 흰 손을 내밀었다. 우아한 속눈썹을 치켜올렸다가 내리며.

 "만나서 반가와요."

 애나가 말했다.

 "매력적이군요."

 아수세나는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말을 건넸다.

 애나는 아수세나의 고전적이고 귀족적인 용모를 보면서 좀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고야 그림의 모델감이라고 생각했다. 또 크리스티안과 아수세나를 나란히 보며 그들이 친척 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촌간? 혹은 남매간?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알 수 없었고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에게는 아주 냉담한 기운이 스며 있다.

 "디스코가 시작되는군."

 크리스티안이 말했다.

 "그런데 애나, 잔이 비었군. 내가 가서 먹을 걸 좀 가져오겠소."

 "먹을 건 필요없고 샴페인이나 한 잔 더 하겠어요."

 음악소리가 좀더 커지면서 현대음악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혼자서 혹은 쌍쌍이 플로어로 나가기 시작했다. 애나는 도도한 아수세나가 어떻게 하나 호기심있게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수세나가 머리를 흩뜨리고 춤을 추리라곤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역시 그녀는 동상처럼 꼿꼿이 선 채 선망의 시선을 받으며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했다.

 "애나, 약속을 잊지 않았겠죠?"

 레오폴드가 다가와서 말했다.

 "춤 가르쳐 드리는 거요? 물론이죠."

 그는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잠깐 크리스티안을 바라보고는 레오폴드와 함께 플로어로 나갔다.

 타고난 리듬 감각으로 애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멋지게 춤을 추었다.

 레오폴드는 마치 굳은 진흙덩어리 같았으나 그녀는 열심히 가르쳤다. 잡아당기고, 밀고, 돌리고, 마침내 레오폴드는 힘이 빠져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정력의 쇠진에 대해 투덜거리더니 제자리로 돌아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이제 그녀는 음악에 빠져들어 혼자서 춤을 추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단순한 육체적 행복에 푹 잠겼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율동 속에서 기쁨을 느꼈다.

 "애나, 애나…"

 크리스티안의 목소리가 겨우 들렸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굉장한 춤 솜씬데 어디서 배웠소?"

 그녀에게 잔을 쥐어주며 그가 물었다.

 "배워요? 맙소사! 난 결코 배운 적은 없어요. 스스로 배웠죠. 요즘은 누구나 춤을 춰요. 어떤 정해진 형식이 있는 게 아니니까."

 샴페인은 매우 차갑고 혀를 톡톡 쏜다.

 "당신을 둘시네아에서 한번 일하게 하고 싶소."

 그가 말했다.

 "하룻밤만. 다음주 금요일. 지금 있는 다른 댄서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아요. 그들 중 한 명이 다음주 예약을 취소했거든."

 "나보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라는 거예요?"

 "바로 그거요. 당신은 센세이션을 일으킬 거요."

 "아니, 관중 앞에서? 무대에서요?"

 "당신이 원한다면 말이오. 단 하룻밤만."

 "어머, 천만에요. 난 못해요."

 "왜 할 수 없다는 거지? 조금 전에 당신을 지켜봤소. 그리고 토니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알았소. 난 그들이 주점에서 당신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을 도와 줄 수도 있소."

 그가 빌랄바라고 부르지 않고 토니라 부른 건 약간 뜻밖이다.

 "그런 게 아녜요."

 애나는 설명했다.

 "단지 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출 수 없다는 거죠. 난 굉장히 부끄러움을 타거든요."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장난스런 표정과 짜증스럽고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인다. 하지만 입가엔 미소가 남아 있다.

 "애나, 당신 말은 앞뒤가 맞지 않잖소. 조금 전 당신은 규제받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춤을 추었는데…"

 "모든 시선? 하지만 난 누가 보고 있다는 걸 미처 의식하지 못했어요."

 "말했듯이 당신은 하나의 센세이션이었소. 하지만… 됐소. 이제 그 얘기는 그만둡시다. 당신 문제가 아니니까. 대행사를 통해서 다른 댄서를 구할 수 있을 거요. 요즈음은 어째 내가 불운의 연속인 것 같아. 피아니스트도 토요일 연주를 취소했고, 대신 연주할 사람도 그만둬 버렸으니…"

 "그래요? 난 피아노는 칠 수 있는데요."

 자기가 그 일을 자원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와 버리고 말았다.

 "당신이?"

 "그럼요. 제법 치는 편이에요. 이스트본 클럽에서도 연주를 했었는걸요."

 "나이트클럽에서 말이오?"

 "아뇨."

 그녀는 웃었다.

 "하지만 때때로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해 연주했어요. 60살 이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클럽에서요. 어떠세요?"

 "그러면, 애나, 나를 도와 주겠소?"

 그녀는 대답하기 전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못할 이유가 없죠.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요. 난 클래식, 재즈, 흘러간 노래, 뭐든지 칠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요."

 "애나, 사람들 앞에서 춤추는 건 부끄러워하면서 어떻게 그들을 위해 연주는 할 수 있소?"

 "그건 전혀 다른 거예요."

 그녀는 가볍게 말했다.

 "미스 던, 당신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군. 당신에게 그렇게 숨은 재주가 많은 줄 누가 알았겠소?"

 "사실…"

 그녀는 그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당신이 조금만 신경을 써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면 뜻밖에 재주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사람은 누구나 한두 가지 재능은 갖추고 있게 마련이니까요."

 이것은 평소 그녀 자신의 생각이기도 하다.

 "정말일까?"

 그는 진지한 척한다.

 "내 말을 믿지 않는군요. 하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어느 한 면에 있어선 뛰어난 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능력을 발휘하는 데 평생이 걸리기도 하죠. 우리 할머니는 6O살이 돼서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럼, 난? 난 어떤 방면에 특별한 소질이 있는 것 같소?"

 "당신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가 동시에 두 가지 표정을 지닐 수 있다는 걸 신기하게 생각했다.

 "내 생각에 당신은 관리하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과감하게 말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일 거예요."

 "그다지 매력적인 재능은 아니군."

 "저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어떤 리더십에 의해서 조정되는 거예요."

 그녀는 그에게 일깨워 주었다.

 "어떤 무시 못할 힘 말예요."

 "그렇다면 나는 힘에 미친 사람이군. 과대망상증 환자일 뿐이란 말이오?"

 "그런 의미는 아니예요. 하지만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뜻대로 사는 걸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물론 그렇게 하고 있소."

 그는 그녀 가까이에 서서 한 손으로는 벽을 짚어 그녀를 파티로부터 차단시키고 있었다. 검은 눈이 자신의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아서 그녀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눈길을 가로막았다.

 "나는 내 식으로 사는 걸 좋아하지. 하지만 그 애매모호한 재능 외에 다른 소질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아니면 나는 그렇게 한계가 정해져 버린 거요?"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그녀는 우물쭈물 말했다. 그와 가까이 있으면 가슴은 몹시 두근거리고 그를 원하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욕망과 두려움이 귀에서 서로 부딪친다.

 "내가 지닌 재능을 보여 줘도 되겠소?"

 "네, 보여 주세요."

 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뭇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그녀의 손을 잡아 문 쪽으로 이끌었다.

 갑판 위는 서늘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토록 햇살이 뜨거웠고, 다시 몇 시간만 지나면 또 뜨거워지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떠들고 웃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발밑에서는 음악이 쿵쿵거린다. 그는 말없이 애나를 난간 쪽으로 이끌고는 포도주 빛으로 물든 바다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그녀는 그가 자기를 포옹하고 키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또 그의 뜻을 잘못 읽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그것은 가벼운 입술의 부딪침이었다. 그렇지만 그 행위는 지금까지 모든 남녀 사이에 서로의 욕망과 열망을 전달해 주었다. 그것은 때론 시름에 젖게도 하고 행복감에 도취하게도 한다.

 왕자에 의해 잠이 깬 공주처럼, 그녀는 그의 키스에 의해 막연히 상상만 하던 감각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그 상상은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던가. 이 새로운 세계는 훨씬 더 감미롭지 않은가! 그녀는 몸을 뒤로 젖혔지만 그는 더욱더 바짝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어느 한 곳 사랑과 욕망을 느끼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자연은 그녀를 잘 빚어 놓았다. 그녀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선사받고 있는 본능적인 감각을 이제야 조금씩 깨우쳐 나가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는 이제 그녀가 겪게 될지도 모를 걱정에 대해 속삭여 주었다. 그것은 놀라움이었다. 한번의 키스, 한번의 애무는 모두가 처음 느껴보는 희열 그 자체였다.

 거칠면서도 부드럽게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 그의 숨가쁜 심장의 고동 소리는 그녀에게서도 똑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난 원했었소,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은 모를 거요. 내가 얼마나…"

 그가 속삭였다. 하지만 그것은 애나의 말이기도 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그가 자기를 감정의 무감각 상태에서 끌어내,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감각들을 다시 부활시켜 주리라고 느끼지 않았던가.

 부활? 하지만 전에는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했었다. 딘의 키스는 그렇게 큰 감동을 주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따라오겠소?"

 그가 물었다.

 "네."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는 그가 앞장서서 트랩을 내려갔다.

 "다른 손님들은 어쩌죠?"

 그녀는 막연히 선실을 가리켰다. 그는 호스트로서의 자기 의무와 모든 걸 잊었다는 듯 심란하게 돌아다봤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주었다.

 "차에서 나를 기다려 주겠소? 그들에게 당신을 데려다 준다고 말하고 오겠소. 내 승무원들이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까 나를 필요로 하진 않을 거요. 그들에겐 음악과 음식, 그리고 술이 있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알 텐데요?"

 그녀는 가볍게 항의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봤다. 무엇을 안다는 건가? 우리가 사랑을 하러 함께 나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그것을 하려고 하는 건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현실인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는 그런 것 상관 안하오."

 그가 말했다.

 "당신은?"

 그녀도 고개를 저었다.

 "나두요."

 그녀는 자신도 상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화로운 차에 홀로 앉아서 그녀는 처음으로 동요를 느꼈다. 자신이 이성을 잃은 건가? 계속 이대로 나갈 수 있는 건가? 확신할 수 없다. 단지 이 상황을 거꾸로 뒤엎을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차 안의 백미러를 돌려 얼굴을 들여다봤다. 조금 전의 자신과 같은 사람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글쎄, 겉으로는 변한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변해 있다. 어쩌면 영원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크리스티안이 어서 오기를 바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끄러움과 후회로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가 트랩을 내려와 서둘러 차로 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항구의 불빛들을 잠시 주시했다가 몸을 돌려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차는 곧 출발했다.

 애나는 오늘밤 죄의식을 갖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토니와 테사가 잠들어 있는 지역에서 멀리 떠나자 약간의 번민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말했다. 그들은 서로 같이 있고 나는 혼자야. 나도 사랑할 권리가 있어.

 둘시네아라는 간판이 보였지만 네온사인은 꺼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이미 문을 닫은 것 같다.

 타이어가 널빤지 위를 달리는 느낌이 들더니 차는 정문 앞에서 멈췄다. 그것은 크고 흰 건물인데, 일층 창에는 격자 무늬 창살이 달려 있고 문에는 아치식 쇠 장식이 붙어 있다.

 "나는 이 클럽 위에 아파트를 갖고 있소."

 그가 말했다.

 애나는 차에서 내렸다.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바다냄새는 여기까지 따라온 것 같다. 밤공기는 이스트본의 기억을 되살려 준다. 집에서 이렇게 멀리까지 와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괜찮소?"

 그는 애나의 어깨 위에 팔을 감았다. 틀림없이 그녀가 약간 떨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애나, 내 아름다운 사람."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문은 이중으로 잠겨 있었다. 그가 문을 여는 동안 그녀는 잠시 동요하며 서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안은 어둡고 담배 냄새와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불을 켜자 방의 반 쪽은 짙은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테이블 위에는 유리잔들이 널려 있고 재떨이엔 담뱃재가 수북하다. 바닥도 지저분하다.

 "아침에 청소부가 올 거요."

 그녀는 그것들을 보며 토니가 주점에서 했어야 할 고된 일들을 생각하고 잠시 연민에 잠겼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테이블 사이를 지나 저쪽 방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한밤중에 남을 깨우지 않으려는 도둑같이 부자연스런 걸음을 걷고 있다고 느끼곤 걸음을 멈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긴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소."

 그는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얘기했다.

 "당신은 여기서 혼자 자나요, 매일 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녀는 너무 순진한 질문에 스스로 얼굴이 붉어졌다. 크리스티안 같은 남자가 일부러 원하지 않는 한 혼자서 잠들 리는 없겠지.

 "내 말은요, 경비원 같은 사람들을 안 두고 있냐는 거예요."

 "그렇소. 평소엔 카를로스도 여기에 묵고 있소. 오늘 당신을 데려온 사람 말이오. 하지만 그는 지금 배에 있지. 오늘밤 내내 거기 있을 거요. 우린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거요."

 그녀는 그가 카를로스에게 이미 지시했다는 걸 알고 놀랐다. 남자들끼리? 슬쩍 귀띔을?

 그녀는 움찔했는데, 그 마음의 변화는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돌아서서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애나?"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마음이 바뀌었군, 안 그렇소?"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미안해요."

 그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천천히 숨을 내뿜었다.

 "좋아요, 당신이 선택한 거니까."

 "당신을 골탕먹이려 한 건 아니예요."

 "당신을 믿고 있소."

 그가 진짜 믿어 줄지 걱정된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걸로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거로 생각했어요. 정말로 나는… 알 수 있겠죠? 하지만…"

 하지만? 처음의 감동적인 키스와 지금 사이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많이 생각할 여유가 있었고, 그의 팔에 안겨 있지 않았던 긴 시간들이 있었다. 정열이 유혹했지만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술도 깼다. 샴페인도 아마 마음속의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을 했을 거다. 그것들은 자신을 잔뜩 부풀게 했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게 했다.

 마음속으로 그녀는 애원했다. 제발 나를 안아 주세요. 한번 더 키스해 주세요. 화나지 않았다고 말해 줘요. 그러면 난 다시 불꽃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그는 그저 주머니 속의 키를 딸그락거리며 창문 밖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이미 핑크빛 기운이 몇 줄기 감돌기 시작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 주겠소."



                   5



 너 자신을 여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해? 정상적이고 정열적인 여성이라고? 웃기는 소리야. 넌 덜 자란 계집애에 불과해. 알겠니? 네 자신을 똑바로 봐. 너란 존재는 도대체 뭐니? 쌀쌀맞고 정나미 떨어질 만큼 샐쭉거리기나 하고, 정감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그런 계집애일 뿐이야.

 애나는 침대 위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손거울에 비춰 보았다. 핑크빛 실크 드레스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포도주 찌꺼기처럼 퍼져 있다. 어젯밤에 함부로 벗어던졌기 때문이리라.

 "일어났니? 애나, 대답해 봐."

 테사가 노크하며 그녀를 불렀다.

 "응, 잠깐만."

 테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걱정을 가득 담은 표정이다. 애나는 자신의 행동이 언니의 눈에 아주 걱정스럽게 비쳤다는 걸 알았다. 모든 게 내 잘못이야.

 "언니, 미안해. 이렇게 늦잠을 잘 생각은 아니었는데…"

 거울을 내려놓으면서 애나가 말했다.

 "괜찮아, 그런 건. 다만 우리는 네가 걱정돼서 그래. 12시가 넘은 걸 아니? 무슨 일야? 아직 술이 덜 깬 거야?"

 테사는 열이 있는가를 알아보기라도 하려는 듯 애나의 이마 위에 손을 얹으며 자상하게 물었다.

 "괜찮니?"

 "난 괜찮아."

 애나는 고개를 숙여 언니의 시선을 피했다. 테사가 근심 어린 표정을 띠고 있어서 마음이 아프다.

 "언니, 정말 미안해. 지난밤엔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참 오늘은 교회에 안 갈 거야?"

 "갔다 왔어."

 "으응? 벌써?"

 "얘, 너 저 드레스 좀 봐라. 얼마나 비싼 건데."

 쯧쯧 혀를 차며 테사가 말했다.

 "응, 곧 걸어 놓을게."

 "소용없어, 벌써 너무 구겨져 버렸어. 물건들을 좀 신경써서 간수해."

 "응, 내가 너무 정신이 없었어."

 애나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테사가 말없이 옷장에서 옷걸이를 꺼내어 옷을 정리해 넣었다.

 "커피를 타놨는데 가서 같이 마시자."

 "좀 씻고 나서."

 "그래, 빨리 와, 식기 전에."

 "일 분이면 돼."

 항상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는 것은 애나의 결벽성 때문이다. 감정의 벼랑에서 항상 후퇴한다면 어떻게 한 남자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크리스티안은 내게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 보인 것이다.

 언제든지 나를 엄마와 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테사에게도 너무 걱정을 끼쳤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이 너무도 가슴 아프다.

 "자, 이제 그만 걱정하자. 자책은 할 만큼 했잖아?"

 그녀는 애써 자신을 타이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 이제 정신이 났니?"

 애나가 거실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테사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처제, 괜찮아? 기분은 어때? 어젯밤엔 좀 걱정했어."

 토니가 그녀에게 커피를 한 잔 따라 줬다. 그는 항상 테사와 애나 사이의 긴장된 분위기를 말끔히 지워 버리곤 한다.

 "좋았어? 파티는 맘에 들고?"

 "네, 멋있었어요."

 애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난 손님들 점심준비를 하러 가야겠어."

 토니는 둘을 남겨 두고 나갔다.

 테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는 근심스런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애나에게 다가앉았다.

 "애나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니? 솔직히 말해 봐. 나는 널 잘 알아. 속이지 말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하렴. 카사스와 무슨 일이 있었니? 혹시 그가 무슨 짓을 한 게 아니니?"

 테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고 떨리는 음성이다.

 "아냐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긴… 그이는 끝까지 신사답게 행동했어."

 "그럼, 네게 뭘 을러댔니?"

 "아니, 그런 일 없었어."

 "그럼, 토니나 주점에 관해서는?"

 "그런 말은 꺼내지도 않던데?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았어. 언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이용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확신해."

 애나는 크리스티안의 뜻이 뭘까 생각했다. 지난 2주 동안이 휴전상태였다면 이제는 다시 복수전을 꿈꾸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는 테사의 생각처럼 그렇게 사악한 사람은 아니다.

 전화 벨이 울렸다. 토니가 받는 동안 애나와 테사는 서로 누구의 전화인지 귀를 기울였다.

 "애나, 전화받아 봐. 카사스가 통화하고 싶다는데…"

 "네."

 애써 마음을 안정시키고, 신경과민의 표시를 안 내려고 주의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애나를 테사가 주의깊게 바라본다.

 "애나?"

 그는 화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사과의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곁에서 엿들어서가 아니라 그의 목소리가 그럴 용기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저예요."

 "난 당신이 클럽에서 피아노를 쳐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소. 토요일에 당신의 연주를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당신 마음대로요. 편리한 대로 결정해요. 다만 그렇게 해준다연 내게 퍽 도움이 될 거요."

 "할 수 있어요. 몇 시에 그리로 가면 되죠?"

 "가능하다면 8시쯤 당신을 데리러 가고 싶은데…"

 "아뇨, 저 혼자 가겠어요."

 "그럼, 당신 좋을 대로 해요."

 잠시 말이 끊겼다. 마치 서로에의 신뢰가 가득찬 침묵의 소리 같다.

 "저, 그럼 토요일에 봐요."

 이윽고 그가 말을 꺼냈다.

 "8시에요."

 "정말 고맙소."

 "별말씀을…"

 그렇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애나는 제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테사의 안색이 아주 안 좋다는 걸 알아차렸다.

 "너… 그 사람 다시 만날 거니?"

 테사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음, 그가 부탁을 한 게 있어서. 사실은 토요일 밤에 둘시네아에서 피아노를 쳐주기로 약속했었거든. 물론 언니가 힘들 거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이가 자기네 웨이트리스 한 명을 보내 주겠대. 하지만 걱정 말라고 했어. 마틴이 토요일 하루쯤은 주점 일을 돌봐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만 왜 그 클럽에서 네가 피아노를 쳐야 하니?"

 테사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모르겠어."

 애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연히 얘기를 하다 그렇게 됐어."

 "응, 알겠다. 너 지루해서 그렇지? 이곳엔 자극이 될 만한 게 없으니까 좀 호화로운 것을 맛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아니야, 바보 같은 소리 마. 내가 의미하는 건 단지…"

 애나는 갑자기 마음이 아파오면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테사, 애나, 진정들 해. 무슨 일이야? 다투지들 마. 제발들 진정해."

 토니의 얼굴이 근심으로 잔뜩 흐려졌다. 그는 양쪽 팔에 애나와 테사를 안았다.

 "자, 둘 다 마음을 가라앉혀."

 애나는 미안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다.

 "미안해요, 문제나 소동을 일으키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더욱이 언니랑 형부가 잘해 줘서 참 행복하게 지냈는데…"

 "자, 자, 그런 일에 신경쓸 거 없어. 만약에 마틴이 거들어 준다면 애나는 가서 피아노를 칠 수 있잖아. 테사, 그렇지? 우리 그런 일에 신경쓰지 말자구."

 "좋아요."

 테사가 동의했다. 토니는 늘 이처럼 아내를 달랠 수가 있었다. 애나도 마음이 놓였다.

 "그럼, 아무 일 없는 거로 하는 거지?"

 토니는 두 사람을 다독거렸다.

 "우리 점심 먹고 산으로 드라이브나 갈까? 아니면 수영을 하러 가든지."

 "좋아요, 점심은 제가 준비할게요."

 애나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두 분은 그냥 구경만 해요. 나도 요리할 줄 알아요. 형부만큼은 못하지만."

 애나는 주방으로 가서 토마토를 저미고 상치를 씻고, 포도주와 식초, 갓 짜낸 올리브 기름으로 향기로운 드레싱을 만들었다.

 "애나, 네 고양이들 생각 좀 해줘."

 어떻게 하고 있나 보러 온 테사가 다정하게 애나의 허리를 잡으며 말했다.

 "넌 걔네들을 나한테 떠맡긴 거니? 난 먹이를 조금밖에 안 줬잖아."

 "저런! 가엾은 것들."

 애나는 미처 고양이들을 살피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다.

 "우린 다시 우애를 회복한 거지?"

 테사가 애나에게 살며시 물었다.

 "물론, 언니, 미안해. 내 행동이 언니에게 걱정을 끼쳤다면 용서해 줘. 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 언니를 화나게 할 줄은 몰랐어. 언니, 난 그와의 약속을 지켜야 해. 그렇게 되면 그가 우리에게 신세를 지는 거잖아, 그치?"

 "그래."

 테사는 손가락으로 드레싱의 맛을 보았다.

 "맛이 어때?"

 애나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초를 너무 많이 넣었나?"

 "아냐, 맛있는데?"

 테사는 냉장고를 열어 애나 대신 고양이에게 줄 먹이를 찾아보았다.

 "애나, 내가 어쩌다 그 집 잃은 고양이들을 거두게 됐지?"

 테사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언니, 미안해. 하지만 누군가가 돌봐 줘야만 될 것들이야."

 애나가 계면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음식이나 맛있게 만들어."

 테사는 고양이 먹이를 가지고 정원으로 나갔다. 애나는 자신을 가다듬으며 요리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그것은 전에도 사용했던 수법이다. 딘 때문에 상처를 입었을 때도 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비록 마음속에 고통이 얼마쯤은 앙금처럼 괴어 있었으나 그것은 꽤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날이 갈수록 그를 잊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그에 대해서 그저 담담하게 회상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크리스티안에게 전화를 걸어 토요일에 갈 수 없겠다고 얘기할까? 아니, 다시는 그를 만나지 말아야 되는 건가? 그의 미소를, 그의 음성을 대해서는 안 되는 건가?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그녀를 절망감에 빠지게 했다.

 토니가 점심 식탁을 차렸다. 셋은 모처럼 오붓하게 둘러앉았다.

 "아주 맛있는데, 애나. 아예 주방에서 일하는 게 어때? 식당 요리사로 말야. 난 그저 설거지나 도와야겠어."

 토니가 허풍스럽게 추켜세웠다. 애나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점심을 먹고 나자 토니는 그들을 즐겁게 해줄 생각으로 어딘가에 데려가고 싶어했다.

 "그냥 근처를 드라이브하다가 괜찮은 데가 있으면 쉬다 오는 걸로 해요."

 테사가 말했다.

 "그렇게 해요."

 애나도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차를 타고는 염소들이 노니는 들판을 지나 차츰 경사가 심해지는 비탈길을 따라 드라이브했다. 애나는 뒤에 앉고 테사는 토니 옆자리에 앉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은 곳에서 바짝 마른 관목숲들과 정돈되어 있는 푸른색의 들판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차가 나선형의 커브 길을 천천히 내려올 때였다.

 "어머나!"

 갑자기 테사가 차 앞머리에 머리를 찧으며 고꾸라졌다. 토니가 급히 브레이크를 걸고 공터 쪽에 차를 세웠다.

 "테사, 테사, 괜찮아?"

 토니는 테사를 가슴에 안고 흔들어댔다.

 "언니, 언니, 정신 차려!"

 애나도 테사를 흔들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언니를 그렇게 신경쓰이게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애나는 자책감으로 몹시 괴로왔다. 테사는 기절을 한 것이다. 그냥 잠시 정신을 잃었을 뿐인가?

 "형부, 저 위에 오두막집이 있어요. 가서 물을 좀 얻어와요."

 토니가 뛰어가는 걸 보면서 애나는 테사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테사가 조금씩 신음을 토하며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고 있다.

 "그대로 있어, 언니."

 애나는 테사를 안정시키려고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다독거렸다.

 "괜찮아, 너무 더워서 신경들이 잠시 흥분했던 모양이다."

 테사는 해쓱한 얼굴도 희미하게 웃었다.

 "아, 그런데, 내 애기! 괜찮겠지?"

 "그럼, 괜찮을 거야."

 애나는 테사의 날카로와진 신경을 진정시켰다.

 토니가 물을 얻어 가지고 왔다.

 "괜찮아, 테사?"

 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요."

 테사가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휴, 놀랐네."

 토니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형부도 물 좀 마셔요."

 애나가 그에게 테사가 마시고 남은 물 컵을 건넸다. 토니는 속이 탔었는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자, 참을 만하면 어서 집으로 가지. 집에 가서 쉬어야 회복이 빠르겠어."

 토니가 테사와 애나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요, 어서 돌아가요."

 애나도 서둘렀다.

 돌아오는 도중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침묵의 소리가 저마다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토니는 차를 급하게 몰아 빨리 집에 돌아왔다.

 "테사는 가만히 누워 있어. 오늘은 애나랑 내가 손님들을 다 맞도록 할게."

 토니가 걱정스럽게 테사에게 당부했다.

 "애나, 형부랑 둘이 감당할 수 있겠니?"

 "응, 해볼 만해."

 "만약 내가 필요하면 와서 불러. 너 혼자 손님들 뒤치다꺼리하기 벅차거든."

 "그래, 알았어 언니. 아무 걱정 말고 조리나 잘해."

 애나는 주점으로 나가서 라디오를 틀었다. 그리고 그릇을 닦기 시작했다. 마음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수선하다. 요즈음 며칠간의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도대체 정리할 수가 없다.

 해변에서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네누파르에서의 파티, 그리고 그의 아파트, 모든 것이 뒤죽박죽 머리를 때린다. 그리고 언니의 성화.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까?

 "여보세요, 계십니까?"

 바로 그때 마틴 쇼트가 나타났다. 출입구 위에 늘어져 있는 덩굴에 그가 머리를 부딪치는 게 보였다.

 "마틴, 안녕하세요?"

 애나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아주 기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끝없이 떠돌기만 하던 마음의 상념을 그로 인해서 정리할 수 있었기에 그가 고맙기조차 했다.

 "마틴, 재미 좋소?"

 토니가 양파를 한 아름 안고 빌라에서 나왔다.

 "언니는 좀 어때요?"

 애나가 웃으며 물었다.

 "괜찮은 것 같아."

 마틴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애나가 그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언니가 갑자기 기절을 했거든요. 우리는 언니와 뱃속의 아기가 걱정이 돼서…"

 "괜찮다고는 하는데…"

 토니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나오겠대. 쉬라고 했는데도 막무가내야. 처제가 좀 말려요, 제발 아무 생각 말고 좀 쉬라고."

 "알았어요. 하지만 언니는 자기 고집대로 하려고 할 텐데 잘될지 모르겠네요."

 애나는 약간 답답함을 느꼈다.

 "언닌 지금 무리하면 아주 눕게 될지도 모르는데…"

 "애나 말이 맞아."

 토니가 맞장구를 치더니 주점 밖으로 양파를 가지고 나갔다.

 "저어… 마틴, 부탁 한 가지 들어주시겠어요?"

 애나가 약간 주저하면서 얘기를 꺼냈다.

 "말씀하십쇼. 무슨 부탁인데요?"

 마틴은 가벼운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이 토요일에 가지 않으면 또다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것 같다. 뭐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 무언가 새로운 것이…

 "저어, 걱정거리가 하나 있어요."

 애나는 콜라 한 병을 새로 따서 마틴의 잔을 채워 주었다.

 "토요일 저녁에 제가 어딜 좀 가야 되거든요. 그래서 걱정인데요. 저어… 그날 별일 없으시면…"

 "제가 같이 갔으면 해서 그러십니까?"

 마틴이 반갑게 물었다.

 "아뇨, 그게 아니고…"

 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애나는 그에게 진실된 애정을 느꼈다. 아! 만약 내가 이런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삶이 참으로 향기롭고 달콤할 텐데.

 "문제는… 형부와 테사가 둘이서 손님들을 맞느라고 쩔쩔맬 거라는 거예요."

 "음, 그래서 당신은 내가 주점 일을 도왔으면 하는 거군요? 맞죠?"

 그는 다시 명랑하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 듯하다.

 "성가신 일이지만 좀 거들어 주실 수 있겠어요? 물론 보수는 지급할 거예요."

 그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보수라뇨? 난 그냥 즐겁게 도울 수 있습니다.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좀 얻어 가면 되죠."

 "고마와요."

 애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밀라에서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에게서 온 전화일까? 한순간 애나는 크리스티안의 전화이길 기대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여기 좀 부탁해요."

 "그렇게 하세요."

 애나는 안으로 뛰듯이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애나? 당신이오? 크리스티안이오. 지난밤의 일은 잊기로 합시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순전히 내 잘못이었소. 그저 당신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소…"

 그녀가 전화를 받고 거실을 나올 무렵 벨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테사가 받았는데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애나는 크리스티안이면 어떡하나 걱정이 됐다.

 그녀는 거실 창문을 통해 테사가 통화하는 모습을 보았다. 통화시간이 꽤 길다.

 "누구야?"

 애나가 소근거리듯 물었다. 테사는 눈썹을 찡긋하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했다.

 "누군데?"

 테사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놀랄 만한 얘기를 살짝 전했다. 단지 둘만이 알아들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어머니야."

 테사가 조용히 얘기했다.

 "어머니가 이리로 오신대."



                   6


 "만약에 하느님께서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기를 바라셨다면."

 아멜리아 던 부인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날개를 달아 주셨을 거야."

 비행기라는 괴물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므로 지극히 위험하고, 또 덩치가 커서 하늘로부터 추락해도 그건 당연하다는 것이다.

 때로 부인은 안타까운, 그리고 신에 대한 참회의 심정으로 비행기의 추락사고와 아슬아슬한 탈출경위를 보도한 신문기사를 읽는다. 블랙박스니 비행기록장치니 하는 따위는 부인에겐 다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녀는 비행기들이 걸핏하면 땅으로 떨어지는 것도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사물은 원래 놓여진 곳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하늘을 나는 일을 허락받지 못했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다.

 "승무원들도 무척 힘들 거야."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애나가 말했다.

 "정말이야."

 테사도 끄덕이며 동의했다. 두 자매는 맑은 청담빛 하늘을 응시하며 금세라도 어머니가 모습을 나타낼 것만 같은 공항 라운지에서 던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정말 획기적인 일이지?"

 "그렇구말구."

 그건 사실이다. 어머니의 일생에서 이처럼 큰 모험을 하기로 마음먹은 일도 아마 별로 없을 테니까. 대이변이 아닐 수 없다. 던 부인은 이날까지 변함없이 믿음직스러운 두 다리를 굳게 딛고 살아왔으며, 그녀가 맹세했듯이 그 누구도 그녀를 '그 따위 몹쓸 것'에 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를 보고 싶어하는 딸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가려고 비행기를 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여러 날이 걸리더라도 부인은 배편으로 산탄데르에 와서는 열차를 타고 스페인을 횡단했을 거다. 하지만 테사가 임신중이고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므로 비행기를 타고 부랴부랴 달려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하지 않는 건데."

 기운없는 목소리로 테사가 말했다.

 "난 말야, 그저…"

 "무슨 말인지 알아."

 애나도 안쓰럽게 언니를 바라봤다.

 "난 엄마에게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응, 그치만 엄마를 잘 알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희미하게 모습을 나타냈던 반점 하나가 점점 확대되더니 금속성 광채를 띠면서 가까와오고 있다.

 "저게 맞겠지?"

 "그럴 거야."

 서로 팔을 낀 채 그들은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출구를 향해 발을 옮겼다. 두터운 체크 무늬의 모직 코트에다 깃털이 달린 모자로 치장한 유별난 모양새로 해서 던 부인은 쉽게 눈에 띄었다. 부인은 여행이란 쓸데없이 불편하고 추운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맙소사! 엄만 대체 뭘 입고 계신지나 아세요?"

 테사가 불만스런 얼굴로 어머니의 가방을 받았다.

 "오! 사랑스런 내 아가들."

 부인은 두 딸을 차례로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다.

 테사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코트는 좀 벗는 게 어때요? 온도가 자그만치 32도나 된다구요. 덥지도 않으세요?"

 "얘야, 고맙긴 하다마는 그냥 입고 있겠다. 덥다고 해서 마구 벗어대면 탈나요."

 던 부인은 지극히 어머니다운 음성으로 말을 막았다.

 "하긴 그렇긴 해요."

 엄숙하기까지 한 어머니의 목소리에 웃음을 참으며 테사도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여행은 어떠셨어요, 엄마?"

 걸음을 옮기며 애나가 물었다.

 "얘깃거리가 많으실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 그래. 참 멋진 여행이었지. 암, 그렇구말구. 젊은 아가씨들이 얼마나 친절하게 시중을 들어주는지, 예쁘기도 하지. 불편한 건 손톱만치도 없었단다. 식사는 또 어떻구. 예쁘장한 접시에 이것저것 담아서 내다 주는데 맛이 기가 막히더라. 빠르지, 깨끗하지, 이젠 누가 여행을 한다면 비행기를 이용해 보라고 권해 주고 싶구나."

 부인은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해 있는 두 딸을 뒤로 한 채 북적이는 대기실을 가로질러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제가 부탁 드린 악보집은 잊지 않으셨겠죠?"

 차 뒤의 트렁크에 짐꾸러미를 실으면서 애나가 물었다.

 "물론, 잊을 리가 있니?"

 "애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해 주기로 했어요."

 테사가 활기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애나가 하는 일을 결국 받아들였으며 약간의 자부심마저 느끼고 있다. 사실 테사는 애나의 음악적 재능에 평소부터 깊이 감동하고 있었다.

 "그리 나쁘진 않다마는 난 네가 그 일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던 부인은 나무라듯 말을 이었다.

 "그랬다간 눈가에 시커멓게 기미가 낄 게다."

 "빌라가 마음에 드실 거예요, 엄마."

 애나가 얼른 화제를 바꿨다. 던 부인은 스페인엔 처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부인은 스페인이 지독히 멀고 삭막한 곳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는 짓다 만 별장들이 눈에 띄었다. 바닷가 안개 사이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러나 제법 커다란 탑 모양의 골조가 희미하게 윤곽을 나타냈다. 고속도로를 따라 질주하며 계속 빠르게 바뀌는 차창 밖 광경에 부인은 감탄을 연발했다.

 "어쩜, 이렇게 근사할까!"

 "대부분의 유명인사가 이곳에 별장을 갖고 있어요. 영국인들이 이리로 골프를 치러 오기도 하고요."

 테사가 말했다.

 "너희 아버지께서도 무척이나 골프를 좋아하셨지."

 습관적인 눈물이 부인의 눈에 괸다. 남편과 사별하고 거의 l2년을 혼자 살아왔는데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남편에 대한 슬픔이 앙금처럼 자리잡고 있다.

 빌라에 도착해서 한 시간쯤 지났을 때, 테사가 은밀한 목소리로 애나에게 속삭였다.

 "넌 잘되리라고 믿니?"

 "별일 없을 거야."

 애나는 거실에서 침대 겸용의 소파를 손질하고 있었다. 던 부인은 어머니 방인 손님용 별실을 정리하는 중이다.

 "사실대로 인정하는 게 어때? 엄마 눈치는 보통이 아니잖니?"

 테사가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그렇기는 해."

 애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무척 놀라시겠지?"

 "물론 대단히 놀라시겠지."

 "애나! 애나! 이리 좀 와다오."

 뭔가 불만스런 던 부인의 음성이 울려왔다.

 "여기 수도물은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 좀 알려 다우."

 부인은 욕실에서 여전히 우스꽝스런 깃털 모자를 쓴 채 속치마 차림으로 욕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물이 몹시 차구나."

 부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애나를 보았다.

 "여긴 뜨거운 물이 나오질 않니? 형편없구나, 형편없어!"

 애나가 손을 담가 보았지만 역시 물은 차가왔다.

 "차갑지?"

 부인이 다시 욕조를 불만스럽게 노려보며 확인하듯 묻는다.

 "엄만 찬물을 틀어 놓으셨군요. 그건 찬물 꼭지…"

 "그런 소리 말아라. 저쪽엔 분명히 <C>라고 씌어 있잖니?"

 "알아요, 엄마. 하지만 여긴 영국이 아니잖아요. 여기 사람들은 <HOT>라든가 <COLD>라는 말로 수도꼭지를 구별하지 않거든요. 여기서 <C>는 뜨거운 걸 말하죠. 그건 칼… 뭐라고 하든가… 아무튼 그 말을 따온 거예요."

 애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부인의 불평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이곳을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증거이면서 동시에 곧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 엄마가 얼마 동안이나 계실 작정이지?"

 금요일이 되자 애나는 초조해져서 테사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오신 건 화요일이었는데도 그들에게는 마치 한 달이나 되는 듯 지루하게 느껴졌다. 둘 다 어머니를 좋아하고는 있지만 던 부인의 잔소리는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글쎄다, 낸들 어떻게 아니?"

 "설마 아기를 낳을 때까지 계시진 않겠지?"

 "얘는 무슨 소릴! 난 아직 5개월도 채 안 됐는데. 내 생각엔…"

 "나도 알아."

 애나가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래 계시진 않을 거야."

 테사가 말했다.

 "오늘 아침엔 내가 은행에 갈까? 세금도 내고 말야."

 애나가 제안했다.

 "엄마가 좋다면 같이 시내에 나가서 쇼핑도 했으면 해. 집에 그냥 계시게 해봐야 온통 법석만 피우실 거야."

 던 부인은 활기차게 집안을 휘젓고 다녔다. 주방을 정리하고 먼지를 털어내는가 하면 가재도구 따위를 이리저리 옮겨 놓곤 했는데 덕분에 무엇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쨌든 부인이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고 법석을 피운 덕택에 집안은 제법 말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딸의 제안에 던 부인은 꽤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잘 모시고 다녀라."

 테사가 언니답게 애나에게 일렀다.

 이곳저곳의 아케이드를 구경하기도 하고 굵직한 자갈로 단정하게 포장된 건물 사이의 뒷길을 걷기도 하는 중에 애나는 문득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애나는 황급히 어머니를 찾기 시작했다. 불안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기도 하고 여기저기 상점마다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그때 저쪽 편에 요란스럽게 호루루기를 불어대며 바쁘게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검은 선글라스의 경찰관이 보였다.

 애나는 평소 스페인 경찰에 대한 인상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대체로 그들은 친절하고 소년처럼 장난스러운 면도 있으나 허리에 두른 가죽띠나 권총 따위가 유쾌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경찰은 때로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무기를 휴대하지는 않는다.

 "저, 미안합니다만… 영어를 할 줄 아세요? 절 좀 도와 주세요. 사실은 저."

 이럴 때 솔직하게 말한다는 것이 다 큰 숙녀로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전 어머니를 잃어버렸는데요…"

 경찰관은 무관심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바쁜 듯 호루루기를 입에 물었다.

 "엄마를 찾고 있다니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영국에서 왔어요."

 거의 절망적인 기분으로 애나는 손짓발짓을 모두 동원해 던 부인의 차림새를 설명했다. 경찰관의 의아한 표정이 차츰 변하더니 마침내 그는 아리따운 영국 아가씨가 왜 그리 허둥대는지를 알아차린 듯하다.

 "시, 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가 한쪽을 가리켰다.

 경찰관의 손끝이 멎은 곳에는 뜻밖에도 던 부인이 앉아 있었다. 도로변의 한 카페 앞에서 말쑥한 차림의 스페인 남자와 함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던 부인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모자의 챙을 만지작거리며 열심히 뭐라고 말하고 있고, 퍽이나 유쾌한 듯 크리스티안 카사스는 고개를 젖히고 웃고 있다.

 흥분된 가슴을 가까스로 가라앉혔을 때 애나는 자신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무사히 어머니를 찾았다는 안도감은 부인과 동석하고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했을 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어머니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되도록 천천히 발을 떼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크리스티안이 자리를 뜰 것도 같다. 혹은 어머니가 주차장으로 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와 마주치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만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바로 그때 그가 고개를 돌려 애나를 보았다. 애나는 그가 뚫어지게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얼떨결에 그녀는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애나, 여기다. 여기!"

 던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시끄러운 자동차 소음을 꿰뚫고 들려왔다.

 연신 클랙슨을 울려대는 자동차 사이를 헤치고 애나는 어머니 곁으로 갔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에요, 엄마?"

 그들 앞에는 맥주잔이 놓여 있다.

 "애나, 드디어 당신을 찾았군요."

 크리스티안은 정중하게 일어나 애나에게 의자를 권했다.

 "뭣 좀 드시지요."

 "고맙지만 생각없어요."

 애나는 책망이 담긴 눈길을 어머니에게 보내며 쏘아붙이듯 대꾸했다.

 "난 그저 당신 어머님께 당신 걱정은 안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렸을 뿐이오. 당신은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켜 드렸지."

 애나는 어렴풋이 파티의 밤을 떠올리면서 그 말이 자신을 아프게 찔러옴을 느꼈다. 그때도 그랬다. 그의 표현대로 자신은 '현명하게' 처신했던 것이다. 격정도 아니고 욕망도 아닌 현명한 판단으로 그날을 이겨냈었다. 그리고 그 밤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온통 헤매고 다녔단 말예요."

 원망스럽다는 듯이 애나가 말했다.

 "글쎄 말이다, 얘야. 지나는데 작고 귀여운 슬리퍼가 눈에 띄질 않겠니? 아마 너였더라도 틀림없이 맘에 들었을 게다. 그리곤 줄곧 그 슬리퍼만 생각하면서 걸어갔단다. 결국 그걸 사기로 마음먹었지. 그래서 바로 돌아서 왔는데 내 발에 맞는 사이즈는 없다더구나. 별수없이 도로 나왔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웬 골목길에 들어서 있질 않겠니. 그제야 내가 길을 잘못 든 걸 알았단다. 하지만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간 큰길로 나갈 수 있으라고 믿었지. 결국 이렇게 돼버렸지만."

 부인은 자신의 설명이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띠었다.

 "그 자리에 그냥 계시기만 했더라도 제가 그처럼 애를 먹진 않았을 거예요."

 "그걸 몰랐단다. 어쨌거나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지. 다행스럽게도 멋진 카사스 씨를 이렇게 만나게 됐단다. 얼마나 기막힌 행운이니?"

 행운이라구요? 애나는 어이가 없었다. '멋진 카사스 씨'는 그 핸섬한 얼굴에 즐거움을 애써 감추고 있다. 얄밉게도 그는 나를 비웃고 있는 게 아닌가!

 조금 풀어진 자세로 앉아 있는 그는 검정색 바지와 브이네크의 스웨터를 입고 있다. 햇볕에 보기 좋게 그을은 가슴 위에는 십자가형의 목걸이가 이따금씩 반짝거린다. 그의 검은 눈이 오랫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을 위해 맥주를 주문해 놓았소."

 그가 말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 같군. 애나, 좀 진정하도록 해요. 모든 게 잘됐잖소?"

 재차 이르는 그의 말이 애나에게 따뜻한 위로처럼 들렸다.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그의 밝은 미소를 보자 마음이 좀 풀어졌다.

 "맥주를 마시겠어요. 고마와요."

 "당신 어머니께서 내게 사진을 보여 주고 계셨소."

 그가 말했다.

 "사진?"

 "어릴 적에 넌 참으로 예뻤지…"

 던 부인은 눈을 감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 하지만 지금이 훨씬 더 아름답구나."

 어머니는 크리스티안에게 애나의 어린 시절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발레 학교의 콘서트 얘기며 5살 때의 운동회 얘기에 이르기까지…

 애나는 내심 당혹감을 느끼며 어설픈 미소를 짓고 앉아 있었고, 크리스티안은 진지한 눈빛으로 던 부인의 얘기에 열중해 있었다.

 "정말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부인."

 그는 마치 대단한 웃음거리라도 발견한 듯하다. 어떻게 크리스티안이 어머니와 이처럼 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게 됐는지 애나는 의아하기만 했다.

 "저도 기뻐요."

 애나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맥주는 다음에 마시기로 하죠. 우린 지금 돌아가야 해요. 테사와 토니가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생각보다 너무 늦어졌거든요."

 "예정대로 내일 밤에 나와 주겠소?"

 "제가 약속드리지 않았던가요?"

 거의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애나를 보고 부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약속이란 때로 깨지기도 하지…"

 그가 모호하게 말을 받았다.

 "꼭 가겠어요."

 애나는 던 부인의 팔을 끼고는 잡아채듯 일으키며 재촉했다.

 "빨리 가요, 엄마. 너무 지체했어요. 할 일도 많이 밀렸는데."

 "왜 이리 늦었니?"

 빌라에 도착하자 테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엄마가 길을 잃으셨잖아."

 "난 길을 잃은 게 아니란다, 애야. 그저 잠시 너하고 헤어졌던 것뿐이지. 하지만 이렇게 무사하잖니? 그런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다면 그 매력적인 카사스 씨를 만날 수도 없었을 테고."

 "그 사람을 만나셨어요? 어디서?"

 책망의 눈길을 애나에게 돌리며 테사가 반문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애나가 항의하듯 말했다.

 "난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는 엄마와 그를 발견했을 뿐이니까."

 "오해하지 말아라. 난 단지…"

 테사는 돌아서서 신문을 접기 시작했다.

 "좀 이상스럽다는 거지. 네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그 사람이 나타나곤 하니까."

 "우연일 뿐이야."

 애나는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외출 때마다 카사스와 마주치는 일이 우연치고는 너무 잦았다.

 토요일, 애나가 <둘시네아>에 도착한 것은 아직 어둠이 채 깔리기 전이었다. 바깥에는 몇 대의 승용차가 주차돼 있었다. 그녀는 건물 끝쪽에 차를 세우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몇 분간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일을 하러 온 것이란 점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피아노 연주를 잘해내리라는 자신감도 있다. 그런데 대관절 뭘 우려하는 건가? 신경이 곤두서고 가슴이 쿵쿵거리며 이렇듯 산란스러운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애나는 백미러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홍분으로 볼이 약간 상기되고 눈에는 불안한 기색이 감돌지만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

 오늘을 위해 그녀는 산뜻한 흰색 블라우스와 까만색 바지를 입었다. 테사는 핑크빛 드레스를 입으라고 성화를 해대며 다림질까지 말끔히 해주었으나 그 옷을 볼 때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떠올라서 싫었다.

 "자, 기운을 내, 애나."

 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이고는 백을 들고 차 밖으로 나왔다.

 "허리를 곧게 펴고! 걸음은 엉덩이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애나는 모델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며 자갈이 덮인 입구를 향해 가로질러갔다.

 카를로스가 문을 열어 주며 그녀를 맞았다.

 "안녕하세요? 절 기억하시겠어요?"

 애나가 악수를 청하며 물었다.

 그는 짧게 손을 잡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큰소리로 외쳤다.

 "루시아나!"

 그러자 집시 머리를 하고 당돌한 인상에 장난기를 풍기는 어린 웨이트리스가 가까이 왔다.

 "안녕하세요? 미스 던이시죠? 주인님으로부터 당신의 시중을 들어 드리라는 지시를 받았어요. 피아노 바에 먼저 가보시겠어요? 참, 아직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좀 이르니까요. 하지만 조금 있으면 손님들이 몰려들 거예요."

 루시아나라는 소녀는 희고 건강해 뵈는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환히 웃어 보였다.

 "그냥 애나라고 불러요."

 "좋아요, 애나."

 "영어를 꽤 잘하는군요."

 "런던에서 6개월이나 살았는걸요."

 루시아나는 약간 뭉툭하고 살찐 손가락으로 여섯을 펴보였다.

 "여긴 주로 영국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요. 유명한 사람들도 많구요."

 불빛 아래의 클럽 중앙 연회장은 호화로왔다. 테이블커버도 특이하고 크리스탈 장식이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은제 식기들도 은은한 광채를 내뿜고 있다. 근사한 실내장식과 화분들, 그리고 대리석 조각으로 꾸며진 자그마한 분수 등엔 엄청난 돈을 투자했으리라.

 루시아나의 뒤를 따라 여기저기 구경을 하면서 애나는 잠깐 동안 이곳에 머물렀던 일을 회상했다. 그땐 그날 저녁의 비참한 기억의 편린들과 더불어 초라하기만 했었는데, 번쩍이는 광채 하며 진공 청소기, 게다가 뜨거운 온수 설비까지 돼 있으니 기적 같은 변화다.

 "이쪽으로 오세요."

 루시아나는 애나를 피아노 바로 안내했다. 넓지는 않으나 우아하게 꾸며진 방이다. 바닥에는 크림색 카펫이 깔려 있고, 벽에는 목련꽃 무늬가 장식되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

 바의 한구석에는 애나를 설레게 하는 하얀색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굉장하군요!"

 그녀는 탄성을 지르며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건반을 눌러보았다. 이스트본의 집에서는 중고품 소형 피아노로 만족해야만 했었다. 손이 닿을 때마다 전해 오는 청아함과 손마디에 느껴지는 진동에 마음을 설레며 몇 장의 악보를 연주해 보았다. 풍부하고 은은한 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뛰게 했다.

 애나가 고개를 들어 보니 루시아나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루시아나의 검은 눈속에 교활한 빛 같은 게 스쳐가는 걸 보았다.

 그러나 루시아나는 곧 몸을 돌려 자기의 업무에 열중한 듯 바쁘게 손을 놀렸다. 비품들을 바로잡기도 하고 그림 위의 먼지를 떨어내기도 했다. 루시아나가 엷은 핑크색 장식 도자기에 꽂힌 길고 매끈한 백합 송이들을 매만지고 있을 때 크리스티안이 들어섰다.

 "애나, 대단해. 역시 훌륭한 솜씨인걸."

 그는 한순간 보일듯 말듯한 매력적인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그는 흰색 재킷을 입고 있는데 셔츠는 뻣뻣하게 풀을 먹인 듯하다. 목에 맨 나비 넥타이가 맘에 들지 않는지 줄곧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어떻소, 피아노가 맘에 들어요?"

 "정말 멋진 피아노예요."

 애나는 서너 장의 악보를 올려 놓고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시선을 악보에 옮기고, 비록 자신의 의식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의 모습만이라도 시선 밖으로 밀어내려고 애쓰면서.

 그녀는 혼자서 프로그램을 작성하고는 종류별로 악보를 정리했다. 그리고 순서대로 다시 연주해 보았다. 애나가 연주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크리스티안도 루시아나도 모두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젊고 잘생긴 스페인 남자 하나가 크롬으로 테두리 장식을 한 바에서 엷은 녹색의 올리브와 땅콩 따위가 담긴 자그마한 나무 그릇들을 꺼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난 호세라고 해요."

 "전 애나예요."

 "연주가 훌륭하군요, 애나. 보통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나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는 하지 마세요."

 "약속하죠."

 애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담배 피우시겠습니까?"

 그는 바 아래서 담배를 한 갑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니예요."

 "보통 피아니스트들보다 예쁘십니다."

 그는 짓궂게 말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됩니다."

 "제 입을 아예 봉해 버려야겠군요."

 애나도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아마 곧 바빠질 겁니다. 참, 뭐 좀 마시겠어요? 말씀만 하세요, 제가 만들어 드리죠. 좋아하시는 거, 아무 거나요. 제 칵테일 솜씨는 일품이거든요."

 "지금은 오렌지 주스가 마시고 싶어요."

 "술 종류는?"

 애나는 스스로를 나무라듯이 조롱하는 빛마저 띠고 멋쩍게 웃었다.

 "사실, 위스키 종류를 별로 좋아하지 앉아서 저도 좀 불만이에요.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런 종류의 술이 저를 싫어한다는 편이 맞겠군요. 그래서 대개 순한 음료를 마셔요. 어쨌든 고마와요."

 "별말씀을…"

 그는 오렌지를 얇게 저며서 즙을 짜내고는 설탕을 뿌리고 차갑게 식혀 놓은 목이 긴 글라스에 부었다. 그리고는 글라스를 바 위에 올려놓고 조금 과장된 몸짓으로 알록달록하게 색을 입힌 작은 종이우산을 펴서 글라스 위에 덮었다.

 "어머, 깜찍해라!"

 애나는 소리를 죽이고 웃었다.

 "상당히 재치가 있군요."

 "아무 일도 아닌 게 여기서는 골칫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는 애나에게 눈을 찡긋했다.

 "이리로 와 앉아서 드시죠. 긴장을 푸는 편이 나아요. 당신은 지금, 뭐랄까…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긴장감을 전하려는 듯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신경이 날카로와진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도."

 그녀는 피아노에서 일어나 주스를 마시러 바로 가까이 갔다.

 "초조해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당신은 훌륭한 연주가예요."

 "실제로 연주할 때도 잘될까요?"

 "물론이죠."

 그녀가 바 위로 팔을 걸치자 그는 재빨리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멋진 시계로군요."

 "그래요, 제가 아끼는 물건이죠."

 애나는 팔을 빼고 싶었지만 그가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 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스페인 사람들은 악의없는 사소한 희롱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애나는 어쩔 줄을 몰라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호세!"

 "네, 사장님."

 그가 황급히 그녀의 팔을 놓았다. 크리스티안이 험상궂은 얼굴로 문 입구에 서 있다. 애나는 크리스티안이 뭔가 스페인 말로 호통치듯 명령하는 걸 들을 수 있었고, 호세는 그런 데엔 이미 익숙해져 있는 듯 지시받은 일을 하기 위해 나갔다.

 크리스디안이 방을 가로질러와서 그녀 곁에 섰다. 애나는 카펫 위를 가볍게 걷는 그의 발소리를 들었다.

 "미스 던, 당신은 젊고 대단히 매력적이오. 하지만 종업원들의 넋을 빼놓지 않는다면 고맙겠소. 그들은 이곳에 일을 하기 위해 와 있는 거니까."

 "미안해요. 하지만 그건…"

 그녀는 아직까지도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거나 눈을 마주볼 수가 없다는 걸 알았다. 그와 이처럼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울이만큼 견디기 어려웠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 옆에 있는 것 같아 약간 비켜서고 싶은 그런 기분이다. 그의 손이 어깨 위에 놓여졌을 때야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애나…"

 크리스티안은 그녀의 머리칼을 가만히 만졌다.

 "날 그렇게 적대시하지 말아요. 적어도 우린 친구일 순 있잖겠소?"

 "친구라구요?"

 그녀는 크리스티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열정을 우정으로 대신하는 게 쉽다고 여기는 걸까? 그렇다면 크리스티안은 자기가 생각해 왔던 그런 사람은 아니다. 애나는 그들 사이에 모호한 관계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를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 둘 중의 하나다. 그러나 자신이 크리스티안을 미워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답답하군."

 그의 손이 뾰로통해 있는 그녀의 입술을 더듬어 왔다.

 "그렇지는 않아요. 아니, 그럴지도 모르죠. 어쩌면 내가 모든 걸 망쳐 버렸나 봐요. 지금은 정말이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는 가만히 웃었다. 어느 새 그녀는 그의 뜻밖의 반응과 예측할 수 없는 격렬함, 그리고 급작스레 풍겨오는 즐거움 같은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오, 애나, 정말 철부지 어린애 같군."

 "난 어린애가 아니예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애나는 자신이 그에게 그처럼― 어른스런 옷차림을 하고 맞지도 않는 높은 힐을 신어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어른스러운 양 꾸미는 계집아이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게 불쾌했다.

 "물론, 전부 어린애 같다는 뜻은 아니오. 대체로 여인답기는 하지. 그러나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고 좀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뜻이오."

 "고맙군요."

 그녀는 새초롬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당신이 더 배워야 할 것은…"

 크리스티안은 그녀의 볼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기꺼이 내가 가르쳐 주겠소."

 어떻게 사람이 이처럼 달라질 수 있을까? 그의 용모에서 풍겨나오던 오만함 따윈 흔적도 없어지고 오직 부드러운 미소와 정중함, 한밤에 그윽하게 빛나는 듯한 검은 눈동자만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이렇듯 매혹적인 시선을 완벽하게 표출해내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까? 얼마나 많은 소녀들이 저 매혹적인 눈빛에 매료되었을까? 그러자 그가 자기에게서 추구했던 것이 관능적인 욕망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어요."

 그의 세련된 분위기와 우아한 말투를 무시하듯 애나는 매섭게 잘라 말했다. 그는 마치 영화배우가 연기를 하듯 고통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서는 절망에 가까운 몸짓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말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애나는 피아노 앞으로 돌아와서 악보를 올려놓고 연주를 시작했다. 호흡은 가쁘고 가슴은 마구 뛰고 있다.

 애나는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소파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그녀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 웅얼거리는 대화의 편린들이 잔물결처럼 밀려왔다가는 사라져 버리곤 했다.

 한쪽 코너에서 호세의 모습이 얼핏 눈에 띄었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칵테일셰이커를 다루고 있는데 그 모습은 마치 마라카스를 흔들며 남미의 전통무용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음악은 그녀의 슬픔을 가라앉히고 정신적 평온과 고요함을 가져다 주는 신비한 마력을 발휘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물처럼 맑아졌다. 마치 조약돌 위로 흐르는 찬 시냇물처럼 바닥까지 투명하게 비쳐 주는 자유로운 물이었다.

 "<시간은 강물처럼>을 들려 주시겠습니까?"

 악센트도 없고 모음을 긴장시키지도 않는 영어다. 고개를 들자 30살쯤 돼보이는 남자가 짐짓 꾸밈없는 태도로 피아노 위에 글라스를 올려놓고 비스듬히 기대서 있다. 그는 소년처럼 짧은 금발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묘하게도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네."

 그녀는 대답한 순간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물론입니다, 스타키 씨."

 그 유명한 자동차경주 선수 그레그 스타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레그 스타키가 영국 자동차경주협회의 정식 회원이라는 것도, 이곳에 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이미 들은 바가 있다. 그리고 루시아나도 이곳 둘시네아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늘밤 이곳에서 그들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와 함께 자리했는지 궁금해서 애나는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와 동석한 여자는 정말로 한눈에 알아볼 만큼 낯익은 얼굴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애나가 기대했던 만큼 그런 명사는 아니다.

 아수세나 알바레스는 의자에 자연스럽게 기대앉아 있었다. 검고 윤나는 머리는 거북껍질로 만든 핀으로 고정시켜 우아하게 땋아올렸다. 그녀를 알아본 순간 애나는 정중한 목례와 함께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수세나에게서는 의례적인 답례조차 받지 못했다.

 '건방진 여자로군!'

 애나는 악보를 정리하면서 기분이 상했다.

 '흥, 너희를 위한 연주는 이게 끝이야.'

 그러나 애나가 연주를 끝냈을 때 그레그 스타키는 미소를 띠우면서 잔을 들어올렸다. 적어도 그는 예의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애나."

 호세가 그녀에게 손짓하며 부드러운 소리로 불렀다. 그녀는 피아노에서 일어나 바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좀 쉬도록 해요."

 "괜찮아요, 별로 쉬고 싶은 생각도 없구요."

 그녀는 손을 가볍게 풀었다. 그리고 그에게 전혀 악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이 신경질을 부렸던 일에 미안함을 느끼며 밝게 웃었다.

 "아닙니다, 그건 관례예요. 지금은 휴식시간입니다. 그레그 스타키 씨가 같이 한잔 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당신이 좋으시다면 제가 자리를 준비하도록 하죠. 어떻습니까? 어떤 걸 만들어 드릴까요? 기막힌 맨해턴이 어때요? 스크루 드라이버는? 진슬링? 피나콜라다?"

 "전 오렌지 주스면 돼요."

 애나의 대답에 호세는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좋아요, 정 그러시다면 칵테일을 만들어 주세요. 하지만 독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돼요?"

 "절 믿으세요. 그렇게 해드릴게요."

 다소 두려운 심정으로 애나는 자동차경주 선수와 그의 동반자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는 무릎이 다소 굳어져 있음을 느꼈다.

 "아, 어서 와요. 우리 같이 한잔 하십니다."

 그레그는 팔을 뻗으며 부드럽고 환한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마치 천사의 연주를 듣는 듯했소. 어디서 배웠습니까?"

 "학교에서 배웠죠. 그리고 이스트본에서 사사를 받은 적도 있구요."

 "그레그라고 불러 주시오. 이름이 애나… 맞죠? 호세가 일러 줬어요. 참 그가 마실 걸 좀 드렸습니까?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쪽은 아수세나입니다."

 "우린 전에 만난 적이 있죠."

 잠깐 동안 애나는 그 스페인 여자에게 웃어 보이려고 애썼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석고상처럼 차갑고 움직임이 없다.

 "우리가요?"

 아수세나는 마치 벌레라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애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맞아요! 크리스티안의 파티에 참석했었죠? 그래요, 기억 나는군요."

 애나는 그녀의 태도가 짐짓 꾸민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심 불쾌하고 우스웠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애나, 당신은 이곳에 사시나요, 아니면 휴일에만 계십니까? 스페인엔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레그의 관심은 정말인 듯싶고 붙임성도 있다.

 "여름 동안 머물 예정이에요,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제 언니 테사와 같이 살고 있어요. 언니는 토니 빌랄바와 결혼했어요. 형부는 이곳에서 요리사로 일한 적이 있죠."

 "토니라구요? 이럴 수가! 그 재미있는 친구가 형부라니! 그에게 말 좀 전해 주시겠소? 우리가 이곳에 돌아왔노라고 말이오. 우린 그를 만나고 싶어요."

 "형부는 이곳에 오고 싶어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자기사업에 몰두하고 있거든요. 아실지 모르지만, 조그만 바예요. 식당도 겸하는."

 "그것 참 잘됐군!"

 그레그는 무릎을 탁 쳤다.

 "주소 좀 적어 주셔야겠소. 여기, 여기에다가 적어요."

 그러면서 그는 주머니에서 볼펜과 종이를 꺼냈다.

 "우린 이곳에서 하룻밤 묵을 겁니다. 그렇지, 아수세나? 토니에게 전해요, 그가 만든 파엘라를 먹고 싶다고. 그러면 그는 우릴 위해 거대한 파엘라를 만들 거요."

 "난 싫어요!"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으로 글라스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며 아수세나가 끼어들었다.

 "그곳은 우리가 가기로 했던 곳이 아니잖아요?"

 그레그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는데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할 수 없는 여자로군.'

 애나는 아수세나가 왜 그처럼 화를 내는지 의아했다. 그녀가 그 같은 적의를 보일 아무런 이유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스타키 씨, 전화가 와 있습니다."

 호세가 뒤쪽에서 두 손으로 전화 받는 흉내를 내며 스타키를 불렀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레그는 두 여자를 차례로 쳐다보고는 곧 일어났다.

 "그래, 그랬었군…"

 아수세나는 잔을 비우고는 칵테일 스틱으로 글라스 바닥의 체리를 집어올렸다. 그리곤 가지런하고 하얀 이로 그것을 깨물기 전에 입술에 대고는 감촉을 즐기는 듯했다.

 "그들이 영국 계집아이들에 관해 주고받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들이 사실이었군."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애나는 반문하면서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들이 그랬다니까…"

 아수세나는 칵테일 스틱으로 테이블 위를 신경질적으로 콕콕 찍었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영국 계집애들이 제일 수월하다고 하던걸요? 한 마디로 쑥맥이라고 말이지. 지금 보니 그 말이 사실이군요."

 "난 대체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애나는 그녀에게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그레그가 나에게 합석을 제의한 데 대해서 이 여자가 질투를 하는 걸까?

 아수세나는 뭔가 해명하려는 기색도 없이 애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말해 줬으면 해요!"

 애나는 언성을 높이며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대꾸는 않고 경고하는 듯한 시선으로 애나를 향해 가느다란 손가락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 하얀 소매의 남자 손이 애나의 어깨 너머로 가늘고 긴 글라스에 담긴 크림 칵테일을 내밀었다.

 "고마와요, 호세."

 애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호세가 아닌 크리스티안이 우뚝 서 있었다.

 애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그 모습이 무척 커 보인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까지 그녀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표정, 뭐랄까 순수한 결의 같은 게 나타나 있다.

 그의 시선은 그녀를 겹겹이 싸고 있는 혼란의 껍질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다. 그리고는 한 줄기 빛이 되어 그 혼돈을 녹여 버리고 있다.

 "같이 앉아도 되겠소?"

 그는 의자를 당겨 애나 곁에 앉았다. 그들의 무릎은 거의 닿아 있었다.

 "난 당신을 채용하기로 마음먹었소, 미스 던. 당신은 둘시네아 최고의 매력이 되리라고 믿소. 그리고…"

 그는 비꼬듯 덧붙였다.

 "당신의 연주 또한 대단히 훌륭했소."

 "감사합니다."

 그녀는 글라스를 어루만지며 살짝 입술을 축였다. 칵테일에선 남태평양 파인애플과 코코넛의 감미로움이, 그리고 환한 햇살까지도 느껴졌다. 애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래, 난 너무나 스스로를 괴롭혀 왔어. 난 나에게 주어졌던 모든 기회를 내게 합당한 걸까, 혹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이지나 않을까 걱정만 하면서 놓쳐 버렸어. 마음이 여린 자신은 무지개를 잡을 만한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껏 행복이 스쳐지나가 버리는 걸 쳐다보고만 있어 왔다.

 "우린 얘길 나누고 있었어요."

 아수세나가 입을 열었다.

 "영국의 아가씨들이 스페인 숙녀보다 얼마나 자유분방하고 쉽게 함락되는가를 말예요."

 도무지 어디까지가 진정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차분한 그녀의 음성에는 아무런 악의도, 심술궂은 암시의 빛도 없다. 그녀는 문화적 차이에 관한 단순한 견해를 천진스레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애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전 아수세나가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 개인적인 공격을 하고 있었음을. 아수세나는 자기와 크리스티안이 요트에서 사라졌던 사실에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 나름대로 결론을― 틀리기는 했지만― 끌어냈으리라.

 "크리스티안,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수세나는 교활한 빛을 검은 눈동자에 드리우고 물었다.

 "어쨌든 당신은 이 방면의 전문가니까요. 적어도 여자에 관한 한은."

 "내 생각으로는…"

 크리스티안은 스카치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특정 사실을 그대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오류라고 말하고 싶군, 아수세나."

 두 사람간에는 적대심의 전류가 흐르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긴장은 깊어만 갔다.

 애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그들의 의견이 어떻게 맞부딪치고 있는가를 알았다. 그들이 친밀하리라고 예상했었는데 알고 보니 별로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증오심과 강렬한 경쟁의식 같은 것이 깔려 있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어 있다. 가족이 아니라면 저렇듯 격렬한 대립이 있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만 하다.

 "전 이만…"

 애나는 글라스를 들고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했다.

 "기다려요!"

 크리스티안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앉히며 타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한 그의 말없는 명령에 순순히 응하며 애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그는 그녀의 잡았던 손을 풀어 주었다.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단지 세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오가고 있었다.

 "물론 당신은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질 권리가 있겠죠."

 마침내 아수세나가 크리스티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치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똑같이 비타협적이로군. 애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둘 다 굽힐 줄 모르는 기질을 가지고 있어. 저렇듯 서로 닮았다는 사실을 본인들은 알고 있을까?

 "자, 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레그는 테이블을 감싸고 있는 긴장감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쾌활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애나가 그를 돌아보며 웃었다. 아수세나도 여전히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는 더욱 냉랭하고 거만한 얼굴로 묵묵히 그를 맞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크리스티안?"

 그레그는 아수세나 곁에 앉았다. 편안하게 다리를 꼬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아무 일도 아니야."

 크리스티안이 대답했다.

 가엾은 그레그! 두 사람 중 누구도 그레그를 위해 분위기를 바꿀 만한 미소를 띠우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가야겠어요."

 애나는 글라스를 비우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크리스티안도 만류하지 않았다.

 "칵테일 고마왔습니다, 스타키 씨… 아니, 그레그."

 "별말씀을."

 그가 눈인사를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이해할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단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자신이 크리스티안 카사스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어쩌다가, 또 정확히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밖에는.

 저녁이 은밀하게 밤으로 익어가면서 애나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었다. 사람들은 가버렸고 시계바늘은 어느덧 2시를 지나쳐 있었다. 마음이 텅 비면서 이제까지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 심중에서 스물거리며 언제라도 기회만 있으면 그녀의 의식을 빼앗으려 들던 그런 두려움이.

 마침내 그녀의 빈 마음에 크리스티안이 들어섰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고 실제로 피아노 옆에 서 있는 것이다. 타이도 매지 않고 셔츠는 벌어진 채 술잔만이 소중한 듯 손에 들려 있다.

 저 남자는 지금 지나치게 마시고 있어. 크리스티안에 대한 연민이 그녀를 스쳐갔다. 외로와하고 있어. 그래서 마시는 거야.

 때로 남자들은 마치 하나의 섬처럼 보일 때가 있다. 크리스티안이 지금 그렇게 느껴진다. 그는 완전하고 초연해 보인다. 손댈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섬처럼…

 그녀는 <사랑은 슬픔의 캔디>를 계속 연주하면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글라스를 내려놓고 피아노에 비스듬히 기대서서는 그윽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애나는 연주를 계속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한 멜로디에 또 다른 멜로디를 차례로 이어가며. 급박해서도 안 되고 사이에 공백을 두어서도 안 되리라. 그가 그녀에게 다가서게 되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겠지. 애나는 자신이 그것에 저항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나?"

 그녀는 연주를 멈췄다. 그녀는 손을 여전히 건반 위에 놓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의 목마름으로 부드러워져 있다. 애나는 전에 꼭 한번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의 격렬함이 지금은 절망에 가까운 갈구로 바뀌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갈망이 더 설득력 있고 더 거부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조용히 피아노의 뚜껑을 닫았다.

 "모두 어디로 갔나요?"

 "가버렸소, 모두 다. 그들의 잠자리로."

 "그럼 저도…"

 "그렇소, 갈 시간이오. 우리도 자러 가야 하오."

 애나는 그의 곁에 섰다. 그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올리며 매끄러운 손마디를 천천히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술로 가져갔다.

 "저…"

 그녀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와의 무언의 동조가 이루어지고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애나의 허리로 한 손을 가져가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허리는 점점 더 그에게로 당겨지고 마침내 두 사람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애나는 그의 가슴에 조용히 얼굴을 묻었다.

 크리스티안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나를 봐요, 애나."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백색 섬광이 되어 그녀를 꿰뚫고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지금…"

 크리스티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그녀는 대답했다.

 "좋아요."

 이제까지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확신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애나는 그를 신뢰했다. 눈을 꼭 감고 그가 이끄는 대로 행글라이더처럼, 금빛 찬란한 창공을 날아가는 자유로운 새처럼 욕망의 뜨거운 급류에 실려 높이높이 떠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크리스티안은 애나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의 진주빛 단추 하나를 만졌다. 그가 단추를 끄르자 섬세한 옷깃이 사르르 열리며 아름다운 그녀의 살결이 살짝 드러났다.

 문득 애나는 딘이 생각났다. 그의 집요했던 요구, 그 나름대로 다른 모습의 나를 찾으려고 애쓰던 일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요구했던 육체적인 사랑은 지금과는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지금 자신은 사랑을 성취하려면 상호간의 신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리스티안은 이제껏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욕구― 그와 나 자신을 위한 삶에 있어서의 최고의 경험에 대한―를 충족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애나는 석고상이 아니었다. 서로를 갈구하는 속삭임과 몸짓, 그리고 뜨거운 시선을 주고받으며 그녀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모든 의식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한때는 이러한 행위가 잘못된 거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진실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올라가는 게 어떻겠소?"

 그가 물었다. 호흡은 가쁘고 음성은 약간 쉬어 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7



 아침은 침입자처럼 살그머니 다가왔다. 애나는 누운 채다. 아주 햇살은 조금씩 카펫을 덮으면서 벽으로 기어오르고 있다.

 방에는 검은 반점이 드문드문 찍힌 목재가구가 놓여 있고 값싼 장식품 하나 걸려 있지 않은 걸로 보아 여긴 분명히 남자의 침실인 모양이다.

 그녀는 동반자가 깰까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간밤의 사건을 떠올리며 감정의 그루터기를 찾고 싶고,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도 알고 싶다.

 마치 뱀처럼 그녀는 시트 사이를 살그머니 빠져나와 거울 앞으로 소리없이 미끄러져 갔다. 거울 속에는 사랑의 성취감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여인이 서 있다.

 애나는 거울 속에 비친 크리스티안을 보았다.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그의 숨소리는 나지막하고, 여느 때의 분노와 초조가 없는 얼굴은 티없이 매끄럽다. 그의 평소의 모습 뒤에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지금 그 얼굴을 보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모습, 친절과 관심으로부터 정열과 숭배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레퍼터리가 그곳에 있다.

 지금까지 그는 매우 거칠고 냉정하고 거만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다정한 연인이며 참을성있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줬다. 그는 얼마나 무서운 기질을 나타내 보였던가.

 그러나 이젠 자신이 그를 무서워할 아무런 이유도 존재치 않는다.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냉정하고 지배적인 무뢰한으로서의 크리스티안과 관대하고 용기있는 연인으로서의 그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아름답고 억센 하나의 육체에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설명한다는 것 또한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테사와 토니는 더 이상 그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언니를 생각하자 처음으로 죄책감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혹시 그들이 날 찾고 있지는 않을까? 내가 집에 돌아가지 않은 걸 알고 있다면? 그들이 엉뚱한 억측을 하고 있진 않을까? 하긴 옳은 추측인지도 모르지만. 아냐! 애나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애썼다. 분명히 그들은 내가 늦을 걸 예상하고 잠자러 갔을 거야.

 별탈없이 잘될 듯 싶지만 자신의 낯익은 침대로 빨리 돌아가서 그들의 예상을 뒤엎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많은 설명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어떠한 것― 비난이나 질타 따위―도 자신의 행복을 어둡게 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말자.

 그때 크리스티안이 잠에서 깨어나 애나를 찾았다.

 예전의 애나라면 당황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자신만이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된 그를 신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철회하고 싶지도 않다. 자신들 사이의 친밀한 감정은 아직 그대로다. 졸음 가득한 눈으로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스티안의 천진스러운 모습이 다시금 그러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애나."

 "잘 잤어요?"

 그녀는 그를 향해 돌아서서 부드럽게 미소를 보냈다. 그와 함께 있다는 행복감이 온통 그녀를 휩싸고 있다.

 "이리 와, 애나."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그에게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거기까지는 그의 팔이 미치지 않을 듯싶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티안, 전 지금 돌아가야 해요. 그러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만일 언니가 당신과 밤을 지샌 걸 알게 되면 큰 소동이 벌어질 거예요. 게다가 집에는 지금… 엄마까지 와 계신데."

 어머니 생각이 떠오르자 애나는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가슴이 불안감으로 고동친다.

 "하지만, 너무 이른데?"

 "알아요, 그래도 지금 곧 가야만 날 찾지 않을 거예요."

 "난 보내기 싫소."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는 팔꿈치로 기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금빛 십자목걸이가 그의 가슴 위에서 반짝인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올렸다.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며댈 필요가 있을까? 식구들과 얼굴을 대할 수도, 떳떳이 고개를 들고 사실을 말할 수가 없다는 거요? 아니면 우리의 일이 수치스럽게 생각된다는 거요?"

 "수치라뇨? 어머, 크리스티안!"

 그녀는 완강히 부정했다.

 "정말,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크리스티안이 자신과 다시 만날 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의 사실은 테사를 불쾌하게 만들 게 분명하다. 그러나 어제의 일이 삶에 있어서 새로운 사랑의 시작이라면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현명하리라.

 "애나?"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는 그녀를 자기 곁으로 끌어 앉혔다.

 "당신은 이제 어린애가 아니오. 당신에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소. 혼자 일어서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돼."

 "두렵지는 않아요."

 그녀는 대답했다. 비록 완전한 확신은 없지만.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내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란 걸 아셔야 해요. 제 말은, 그들이 주점을 차린 후에 당신에게 받았던 고통스러운…"

 "그 일은 나도 미안하게 여기고 있소."

 그의 음성에는 후회의 빛이 역력하다.

 "당신에게 말했듯이 난 내 주관대로 살아가고 싶소. 하지만 빌랄바, 아니 토니에 관해서는 내가 새로운 사람으로서 그를 대하도록 하겠소. 이건 하늘을 두고 맹세하리다."

 그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우며 손가락 하나로 가슴에 십자를 그은 다음 자신의 목을 자르는 흉내를 냈다.

 그러한 익살에 애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난 당신을 믿어요, 이젠 당신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구요, 카사스 선생님."

 "오, 이제사 아셨나요, 던 아가씨?"

 "하지만 당신은 테사 언니에게는 결코 호감을 주지 못했어요."

 "호감?"

 크리스티안은 약간 당황했다. 애나는 때때로 크리스티안의 영어가 유창하기는 해도 회화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그다지 익숙치 못하다는 걸 잊곤 한다.

 "그 말은 당신이 언니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는 뜻이에요. 게다가 언니가 간밤에 우리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안다면 놀라 기절을 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적당한 때 내 나름의 방법대로 언니에게 사실을 밝히는 게 스스로 눈치챌 때까지 두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좋아요, 그건 당신에게 맡기겠소.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실에 곧 익숙해질 거요. 앞으로는 내가 당신을 무지무지하게 만나고 싶어할 테니까."

 "무슨 뜻이죠?"

 "이 문제는 내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만 해요. 나뿐 아니라 우리에게, 바로 당신과 나에게. 내가 당신을 내팽개치리라 생각했소?"

 "아뇨, 난 많은 생각을 해보진 않았지만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여겨져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기꺼이 따라가겠어요."

 "애나…"

 그는 그녀의 손에 자기 손을 포개고 천천히 어루만졌다.

 "난 한때 나쁜 짓을 했었소. 그 사실을 인정하오. 남의 약점을 이용하고 청부를 맡기도 했지. 난 성인군자는 아니오. 하느님만은 알고 계시지! 당신은 내가 사람들을 이용해 왔다고 말할 것이오. 하지만 나 역시 비참하게 이용당한 적이 있소. 그리고 복수를 결심하기도 했지."

 "당신이?"

 그러나 크리스티안은 그 일은 언급하기도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당신은 어딘가 달랐소. 난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소, 진실로. 난 당신에게 뭔가가 있다고 느꼈지. 허나 그게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고, 또 그것이 뭔지도 모르오.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건 당신을 원하다는 사실뿐. 그리고 지금 난 당신의 사랑을 얻었소. 정말 당신을 보내고 싶지 않아."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적어도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녀도 고백했다.

 "하지만 여러 소리들이 들려왔죠. 내 가슴속에서도, 언니에게서도. 정말이지 어떤 소리를 따라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어요."

 "당신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요."

 그가 충고하듯 말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아요."

 "아 참, 그래. 그 사내를 잊고 있었군. 당신의 불행했던 경험을 잊고 있었어. 언젠가는 그 일에 대해 내게 말해 주기 바라오. 물론 지금은 말고. 지금은 적당한 때가 못되지."

 "그래요."

 애나도 동의했다.

 "그리고 당신도 내게 그 여자에 관해 말해 줘야 해요? 당신이 괜찮다고 생각될 때 말예요."

 그가 유쾌한 듯 껄껄 소리내어 웃었다. 그리곤 팔을 뻗어 애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은 바로 그와 마주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젖은 입술이 서로를 뜨겁게 갈구했다.

 "그래서 당신은 날 버려 두고 돌아가길 원한단 말이오?"

 문득 그가 물어왔다.

 "원하는 게 아니예요, 크리스티안. 그래야만 한다는 뜻이죠. 내 마음이 편하려면 그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그럼 가도록 해요."

 그는 안고 있던 그녀를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팔을 뻗어 그녀를 가로막았다.

 "난 당신을 막지 않았어. 그렇지?"

 애나는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고 그들의 따스한 살갗이 맞닿았다. 애나는 스스로를 억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았다.

 그가 다시 웃었다. 그를 바라보며 그녀도 온화하게 따라 미소지었다. 그가 입술을 포개왔다. 훨씬 더 격렬하고 뜨겁게. 애나는 깊이깊이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당신이 무슨 말을 했었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눌렀다.

 "난 정말 가야 한다구요."

 나른해진 그녀는 돌아누워 부드러운 베개에 볼을 묻었다. 그의 손끝이 가볍게 등을 두드리는 감촉을 느끼면서 애나는 행복한 무아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는 깜빡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안, 크리스티안, 정말로 가야겠어요!"

 창문으로 비치는 하늘이 장미빛에서 엷은 호박색으로 바뀌더니 이젠 푸른 기마저 띠고 있다. 지금 곧 출발하지 않는다면 소동이 일어날 게 분명하다. 그는 애나가 얼마나 곤란해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은 붙잡지 않았다.

 "좋아요, 애나, 데려다 주고 싶은데…"

 "차를 가지고 왔어요."

 "지금 같이 일어날까? 걷는 모습이라도 봐야지."

 "아녜요, 그냥 있어요."

 애나는 서둘러 준비를 했고, 그는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고만 있다.

 "내 곧 전화하겠소."

 꼭 언제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가 약속했다.

 그녀는 침대로 다가가 그와 긴 포옹을 나누었다.

 "지금 돌아가야 한다는 게 원망스러워요."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알고 있소."

 그들은 잠깐 동안 손을 꼭 쥐었다.

 "아직 아무도 없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저어, 아래층 말예요."

 "어쩌면 청소부들이 일을 시작했을 텐데."

 그가 덧붙였다.

 "신경쓸 것 없소."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요. 그네들도 사람이에요. 어찌됐건 그 사람들도 생각이나 감정을 모두 갖고 있단 말예요."

 "알아, 알고 있다니까. 난 그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다만 그들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것뿐이었소."

 "좋아요. 그럼…"

 방문 앞에 이르자 그녀는 돌아서서는 그에게 손으로 키스를 보냈다. 그도 키스로 답했다. 애나는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핸드백을 어디에 뒀을까? 그녀는 중앙 홀로 들어가는 문을 밀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홀로 들어서자 술 냄새가 풍겼다.

 틀림없이 그와 함께 침실로 갈 때 피아노 옆에 그대로 두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 바에 들어가기 전에 애나는 인기척을 느꼈다. 비누 냄새로 봐서 누군가 청소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신경쓸 것 없소."

 크리스티안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잖아,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뭐. 그래도 그녀는 바의 문턱을 넘으면서 초조함으로 약간 떨렸다.

 검은 머리칼을 위로 묶어올린 소녀 하나가 지난밤 그곳에 꽂혀 있던― 애나는 처음 그 꽃을 보았을 때 크리스티안의 요트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유리화병 속의 백합 송이들을 정돈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애나가 주춤거리며 말을 건넸다.

 루시아나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자그마한 체구에 장난기가 있어 보이던 모습이 여느 때와 달리 짓궂어 보인다. 뭔가 뻔뻔스러운 느낌을 주면서 뜻 모를 악의마저 풍긴다.

 심술궂은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애나의 모습을 재빨리 훑어내렸다. 난 당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다 알아요. 그 눈은 마치 그녀를 힐책하며 그렇게 말하는 듯하다. 난 당신이 무얼하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저… 간밤에 내 핸드백을 여기에 놓고 간 것 같아서."

 애나는 제발 자기가 집에서 온 것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뭔가를 다 알고 있는 듯한 루시아니의 침착한 표정에 비해 너무나 미약한 것이다.

 "저기 있어요."

 루시아나는 애나의 핸드백이 놓여 있는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어머, 다행히도 그대로 있군요. 정말 고마와요."

 "별말씀을…"

 루시아나는 꽂고 남은 백합 송이들을 피아노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커피 좀 드릴까요?"

 애나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가 지나 있다.

 "벌써 다 돼 있어요. 그냥 따르기만 하면 돼요."

 "글쎄요…"

 형부와 언니는 아직도 한두 시간 지나야 깨겠지? 하지만 일 분이라도 지체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것이다.

 "고맙기는 하지만, 좀…"

 "어렵지 않아요."

 루시아나는 유난히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살짝 웃고는 커피를 가지러 갔다. 애나는 초조하게 손가락 마디를 깨물며 할일없이 시계만 자꾸 들여다보았다.

 "자, 여기 있어요. 마셔 보세요. 맛이 괜찮을 거예요. 조금 전에 만들었거든요."

 조그마한 찻잔 받침에 세로로 홈이 팬 컵을 받쳐들고 소녀가 돌아왔다. 정말 커피의 향내는 훌륭하고 맛 또한 신선했다.

 애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스탠드 의자에 걸터앉았다. 루시아나는 벨벳으로 덮인 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운 채 까딱도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언젠가 런던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했죠?"

 용기를 내어 애나가 말을 건넸다.

 "그럼요, 6개월이나 있었는걸요. 파임리코에서."

 "지내긴 괜찮았어요?"

 "좋은 곳이었죠."

 루시아나는 동그스름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가 더 좋지 않아요? 내 말은, 자기 집과 그 밖의 것들이 있는 이곳이 아무래도 낫지 않느냐는 뜻이에요."

 "어머, 아니예요. 스페인은 제 고향이 아닌걸요. 전 그린 카나리아에서 왔어요. 카나리아 군도에 있죠. 들어보신 적이 있으세요?"

 "카나리아 군도?"

 애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네, 그래요."

 "그럼 어떻게 여기서 살게 됐죠?"

 애나는 사실 루시아니의 말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전 알바레스 아가씨네서 일을 했었어요. 그저 그렇고 그런 부자였죠. 어쨌거나 전 그 집에서 자랐어요. 제겐 저 말고도 5명의 자매가 있어요. 너무 많죠? 그리고 갓난 사내 동생도 있구요."

 "가만, 당신이 지금 말한 알바레스 아가씨라면?"

 "아수세나 알바레스 말예요."

 "그래요? 그 여자 집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죠?"

 "하고 있는 게 아니라 했었다구요."

 루시아나가 날카롭게 정정했다.

 "지금은 여기서 일하고 있어요."

 "참, 그렇군요. 그리고 난 당신이 웨이트리스인 줄 알았는데 청소까지 맡아 하나 봐요?"

 "뭐 그저, 이것저것 다 해요. 그 사람이 그렇게 시키는걸요, 모르셨어요?"

 루시아나가 입술을 내미는 모양이 좀 천해 보인다.

 "그 사람?"

 "카사스 씨 말예요."

 "그렇담 그가 좋은 주인은 아니라는 뜻인가요? 그가 맘에 들지 않나요?"

 애나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루시아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쨌거나 그 여자보다는 나으니까요."

 "그 여자보다?"

 "알바레스 아가씨보다는 낫다구요."

 "왜 그렇죠? 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는데요? 심하게 일을 시키든가요?"

 크리스티안이 상당히 독선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적어도 아수세나는 그보다 더 심할 거라고 생각됐다.

 "루시아나, 내 드레스 어디 있지? 루시아나, 왜 내 구두 안 닦아 놨니! 루시아나, 내 지갑은 어디 있니! 어땠는지 아마 당신도 짐작이 갈 거예요."

 루시아나는 아수세나의 거만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가히 상상이 가는군요!"

 애나가 소리내어 웃자 루시아나도 따라 웃었다.

 "그래서 그 집을 나오게 됐나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게 아니라…"

 루시아나가 씁쓰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여자가 절 해고시켜 버렸어요."

 "아니, 왜?"

 루시아나는 작지만 능력있고 쓸 만한 일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 또 우리들."

 뭔가 복잡하고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크리스티안과 아수세나에 대해서 모르시나요?"

 "알다니, 뭘요? 유감스럽지만 난 아무것도 몰라요."

 애나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목이 죄어오는 것 같다. 무슨 얘기를 듣게 되든 자기가 상처를 입을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얘기를 꼭 듣고 싶다.

 "그들은 사촌간예요."

 루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했어요."

 "그래요, 친사촌간이죠."

 루시아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긴장감은 애나가 참아낼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루시아나가 지금 공개하려는 비밀이 무엇인지 짐작이 안 가는 건 아니나, 자신이 나름대로 상상을 비약시켜 갈 만한 용기는 없다.

 "그리고 연인 사이였죠."

 루시아나는 일회용 플라스틱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의 작은 불씨가 환하게 타오르면서 의자의 벨벳 커버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연인 사이였다구요?"

 "글쎄 그렇다니까요. 그들은 결혼하려고 했었어요.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열중하고 있었죠. 게다가 양가의 부모님들도 진심으로 원하는 바였으니까요. 친척들도 몰랐느냐 하면…"

 "결혼은… 타당했나요?"

 애나는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만약 루시아나가 그 말의 의미를 눈치챘다면 그처럼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좌우지간 그는 아수세나를 사랑했어요. 그건 확실해요. 하지만 그 여잔… 뭐랄까. 냉담한 편이었죠. 그 여자가 카사스 씨를 속였다고 봐야죠. 결혼은 했지만 곧 깨지고 말았어요. 그녀가 금방 돌아서 버린 거예요."

 "그게 언제 일이죠?"

 "아마… 3년? 아니, 한 4년은 됐을 거예요."

 애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4년 전의 일이었다구? 그렇다면 이미 오래 전에 흘러가 버린 물이나 다름없다. 그건 단지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일 뿐이다. 카사스라는 남자의 인생과 그의 준수한 용모라면 있을 수도 있을 법한 일이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수세나에게도 그랬으리라.

 특별하게 두드러진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조그마한 관심이나마 생길 수가 있었겠지.

 "물론 카사스 씨는 아직 변함없이 그 여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

 애나는 루시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기에게 이러한 얘기를 해주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

 "결코 그녀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고 있어요."

 루시아나는 자신있게 말을 이었다.

 "그 여자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고 있죠."

 잘도 숨기고 있었군! 애나는 크리스티안과 아수세나가 함께 있었을 때를 돌이켜 보았다. 처음에는 싸늘한 냉랭함이, 두 번째는 보일듯 말듯한 적대감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무관심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야, 결코 그렇지는 않아. 남녀 사이에, 특히나 그런 사이에 어중간한 무관심이 존재할 수는 없는 거야.

 "어떻게 그걸… 확신하죠?"

 "글쎄요…"

 루시아나는 딱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애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당신이 과거의 그가 어땠는지를 알았더라면… 그는 언제나 쾌활하게 웃고 이해심도 많고, 아주 좋은 사람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너무 달라졌어요, 비참할 정도로. 그분을 처음 만난 건 내가 l7살 때였어요. 그때 전 마악 런던에서 건너왔을 때였죠. 그분은 뭐랄까… 맞아요, 백마를 탄 왕자님 같았어요. 그러나 두 사람이 헤어진 후로는 모든 것이 변해 버렸어요."

 "결국 그 여자가 관계를 끊었나요?"

 "아뇨, 오히려 카사스 씨였죠. 난 그분이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루시아나는 묶어올린 머리를 가로저었다.

 "요즘 들어선…"

 "카사스 씨는 아직도 그 여잘 사랑하나요?"

 애나는 루시아나의 머리 뒤로 저쪽 벽에 걸린 그림을 꼼짝 않고 응시했다. 펜과 잉크로 스케치한 페티코트 차림의 소녀가 거기 있다. 문득 모르긴 해도 루시아나는 보기보다는 나이가 더 들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왜 그 여잔 당신을 해고했어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애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알바레스 아가씨 말예요? 말씀드리자면 얘기가 길어요."

 루시아나는 피아노 앞으로 가서 가냘프고 하얀 백합 송이들을 매만졌다.

 "그분은 그 여자와의 과거를 잊지 못해서 이 꽃들을 꽂아 놓고 있어요."

 루시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수세나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그건 <백합>이라는 말이에요."

 "그럴 수가!"

 애나는 탁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았다. 커피 잔이 받침 위에서 엎어지고 커피가 바 위로 쏟아져 흘렀다. 핸드백을 집어들어 자기의 가슴에 꼭 품어안았다. 그녀의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해대고 있다.

 "게다가 정말 우스운 일은 그녀가 질투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루시아나는 백합 한 송이를 화병에 신경질적으로 꽂았다.

 질투를 한다고? 그건 사실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제 바로 그러한 상황을 직접 확인했다. 아수세나는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에게 독설을 퍼붓지 않았던가.

 그 스페인 여자는 지금… 그렇다. 지금 크리스티안이 자신에게 이끌리고 있는 사실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녀는 비록 크리스티안을 거부했지만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참을 수가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만사는 해결되는 듯하다. 방금 전만 해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금 의기양양한 기분이 됐다. 루시아나가 말해 준 어떤 사실도 어젯밤의 사건을 결코 변색시킬 수는 없으리라. 크리스티안이 아수세나를 사랑하긴 했지만 그는 지금 4년 동안이나 자신을 가두고 있던 어둠에서 헤어나 애나라는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는 내게 일거리를 줘야만 했어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루시아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죠."

 "상황이라니?"

 애나는 백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매만졌다.

 "그 여자가 나와 그분을 찾아냈을 때…"

 루시아나는 마지막 남은 백합 한 송이를 화병에 꽂고는 모양새를 보려는 듯 약간 뒤로 물러섰다.

 "우린… 관계를 갖고 있었죠."

 "당신과… 그가?"

 "물론이죠. 아수세나는 정신이 나가 버린 듯했어요. 그 꼴을 당신이 봤더라면!"

 루시아나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때 루시아나의 얼굴에는 완연한 악의의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그녀를 해고해 버린 아수세나에 대한, 그녀를 학대했던 크리스티안에 대한, 그리고 크리스티안과 잠자리를 같이한 애나에 대한 증오다.

 "난… 난 그러지 않았어요…"

 애나는 장님처럼 핸드백이 손에 닿을 때까지 더듬거렸다.

 "난 지금 가야 해요. 난 정말…"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녀는 비틀거리며 문을 향했다. 테이블에 여기저기 부딪칠 때마다 집기들이 내팽개쳐져서 나뒹굴었다.

 "그리고 요트 말예요."

 루시아나의 음성이 그녀를 따라오며 비꼬고 있다.

 "그 여자를 잊기 위해서 샀을 거예요. 그러면서도 그 여자를 따라 이름을 붙였죠. 정말이에요. 네누파르라고 했죠. 수련이라는 의미예요. 그건 모르셨을걸요. 그렇죠, 애나? 물론 당신도 스페인 어를 조금은 알고 있겠지만, 신경쓰실 건 없어요. 그냥 흘려 버리셔도…"

 애나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밖에는 이미 환한 아침 햇살이 비치고 있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자동차 문을 열었다.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돼 있다.

 운전대를 움켜쥐고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미친 듯이 액셀을 밟자 차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전진했다. 차가 지나는 바퀴자국을 따라 조그만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앙 고속도로까지 와서야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하고 가쁜 숨도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애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 하느님, 너무 잔인해요! 어쩌면 이럴 수가! 그녀는 복받치는 감정으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날 사랑한 걸까? 아니야. 그럼, 그가 형부에 대한 우회적이고 복합적인 복수의 일부로서 나를 이용했을까?

 아니야, 그게 아닐 거야. 집시 여자가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잖아? 루시아나는 교활해 보였고 게다가 앙심으로 잔뜩 틀어져 있어. 모두가 다 못되게 꾸며낸 것일 수도 있어. 나와 크리스티안의 모든 것을 망치려는 흉계일지도 몰라.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크리스티안의 일시적인 정부였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버려졌을지도…

 천국에는 분노가 없다오, 증오로 변해 버린 사랑과 같은.

 지옥에도 분노는 없다오, 조롱당한 여자와 같은.

 이런 시구절이 떠오르면서 그녀는 이상하게도 기운이 솟는 걸 느꼈다. 루시아나의 말에 너무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자. 그 여자는 사실 믿을 만한 증인은 아닌 것이다. 그녀 역시 크리스티안을 사랑하고 있는 모양이니까.

 그러나 만일 크리스티안이 정말로 그녀를 이용했었다면 대체 그는 얼마나 썩어 있는 인간일까? 그것도 아수세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짓이었다니! 옛 애인을 괴롭히기 위해 하녀와의 동침. 남자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 동물일까?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름다운 두 스페인 남녀의 사랑 싸움에 이용되고 있다는 수치감이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크리스티안은 아수세나가 있는 자리에서 자신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면서 상냥하게 대했다.

 애나는 그가 어떻게 자신의 손목을 잡았었는지를 기억해 보았다. 또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의 눈이 어떤 빛으로 향했었던가도. 만일 그가 지난날 사랑했던 여인을 되찾으려는 생각이라면 상대방의 질투심에 불을 붙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모든 일이 그의 농간이었다는 게 확실해진다. 애나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자신은 화려한 여주인공인 줄 착각하고 있었으나 알고 보니 하급의 엑스트라조차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백합을 떠올렸다. 키가 크고 우아한 꽃송이들, 아수세나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아수세나, 네누파르, 백합, 수련… 그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우연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녀가 집에 도착했을 땐 눈물이 거의 말라 있었다. 아침 공기가 따스한데도 불구하고 애나는 몸이 으스스해 왔다.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머리는 충격과 탈진으로 멍해 있다.

 애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차에서 내렸다.

빌라는 아직도 조용히 잠들어 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금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절실한 것은 오로지 침대에 몸을 뉘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 것뿐이다. 절망의 고치 속에 스스로를 감싸서 자기를 현혹시키는 기대감의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픈 사랑은 포기해야지.

 현관문을 열자 안으로부터 풍겨오는 친숙한 냄새가 그녀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애나는 불을 켜지 않은 채 낯익은 집기며, 벽, 선반, 그리고 팔걸이 의자와 테이블 등의 사이를 조심조심 더듬어 들어갔다.

 그녀는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지금까지 자기의 도피처였던 소파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너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구나!"

 날카로운 테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8


 "봤으니 믿을 수밖에."

 아멜리아 던 부인은 통에 든 살구 잼을 나이프로 찍어 맛을 보며 말했다.

 "뭔가 수상해."

 그리고는 딱딱한 스페인 빵에 바른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분명 잘못돼 가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낌새도 눈치챘지."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엄마?"

 테사가 흥분하며 물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커피가 좀 엎질러졌다.

 "여기서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난 직감적으로 느낄 수가 있어."

 부인은 두 딸을 향해 나이프를 흔들어대면서 꾸짖었다.

 "너희는 말썽꾸러기들이야. 지금껏 다투고 있었지? 맞지? 엄마는 다 안다."

 애나는 손으로 컵을 감싸고는 식은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예요, 엄마. 별일 없어요."

 테사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동생을 차가운 책망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 네가 저지른 일을 좀 봐! 너 때문에 일어난 말썽을 보란 말야!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애나는 일어서서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한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녀의 초조함 따위는 눈치채지 못한 듯싶다. 테사는 생각보다 훨씬 더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는 자책이 애나를 괴롭혔다.

 애나가 설거지를 끝내고 나자 두 자매는 다시 오전의 햇살이 드는 거실에서 목소리를 죽이며 말을 주고받았다.

 "대체 어디 있었니? 네 걱정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단 말야!"

 "정말 미안해."

 애나는 옷을 벗어 마루의 빨래더미 위에 던졌다.

 "미안하다고? 네가 말할 수 있는 게 고작 그거야? 내게 설명을 해줘야 된다곤 생각지 않니?"

 "지금은 안 돼, 언니. 제발…"

 "여태껏 그 남자와 같이 있었지? 안 그래?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어, 애나. 네 얼굴에 그렇게 씌어 있으니까."

 "언니 좋을 대로 생각해."

 애나는 담요를 두르며 돌아섰다.

 "좋을 대로라니? 그럼 그게 내 좋을 대로 생각한 거란 말이니? 맙소사, 애나, 너 정신 나갔니?"

 "나도 모르겠어. 아마 그럴지도 몰라."

 "제발, 내가 틀렸다고 말해 주렴. 뭔가 좀 다른 변명이라도 해봐. 네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걸 난 믿을 수가 없어."

 애나는 누운 채로 변명을 둘러댈 궁리를 해봤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기는 싫다. 차리리 아무 말도 않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넌 내가 안중에도 없나 보구나. 대체 내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고나 있니?"

 "미안하다고 했잖아."

 "카사스를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니, 안 그래? 그리고 내가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얘기했잖아. 그런데 넌 내 말을 귀담아 듣기라도 했니? 처음엔 점심 데이트, 그 다음엔 파티, 그리고 결국에는… 게다가 넌 네가 끼치게 될 피해 따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모양이구나? 토니와 내가 어떤 곤란을 받을지 생각해 봤어?"

 "언니가 날 위해서 걱정한다는 건 잘 알아."

 테사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모든 게 엉망이 돼버리고 말았어. 아, 어쩌면 좋지…"

 토니마저도 평소처럼 상냥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그의 무언의 냉랭한 비난이 피부에 와닿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해. 그게 바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야. 애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난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또 여기에 별도움도 되지 못했고…

 이스트본이 갑자기 멀고 낯설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행복했었는데… 떠나고 싶진 않았지만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테사가 와서는 그녀 뒤편에 있는 선반 위에서 컵을 내려놓으며 싱크대에 기대섰다. 언니에게 사실을 털어놓아야 하나? 모든 것을? 물론 지금까지 자신들 사이엔 비밀 따윈 없었다.

 애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고양이에게 줄 만한 먹이를 가지러 냉장고 쪽으로 갔다.

 "제발, 하루쯤은 그 고양이들을 잊어버릴 수 없니?"

 테사가 짜증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애나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테사는 동생의 얼굴에 드리워진 고통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녀는 곧 부드럽게 표정을 바꾸고 예전의 다정한 언니로 돌아갔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애나가 테사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테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따뜻한 위로는 오히려 이제까지 억제하고 있던 눈물을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테사는 부드럽게 동생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자, 이리 와. 눈물을 닦아야지. 엄마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

 "미안해, 언니."

 애나는 손수건을 찾으면서 계속 흐느껴 울었다.

 "마당으로 나가자."

 테사가 제안했다.

 "밖으로 나가서 고양이에게 밥도 주고 얘기도 좀 나누자꾸나."

 "좋아."

 애나는 언니를 따라 잔디밭을 가로질러갔다. 발밑에 깔린 잔디가 무척이나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녀는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었다. 고양이는 신이 나서 가르랑거리며 꼬리를 치켜세운다. 테사는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잔디 위에 앉았다.

 "언니 말이 맞아."

 애나는 낮은 목소리로 시인했다.

 "어젯밤 크리스… 아니, 카사스와 함께 지냈어. 그러나 그건 실수였어.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정말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놈이!"

 테사는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널 위해서라면 죽여 버릴 수도 있어."

 "내 잘못이야, 언니."

 애나가 기운없이 말했다.

 "하지만 넌 어리잖아. 그 작자는 30살이나 됐으면서… 정말이지 나쁜 놈이야."

 "그래두… 언니가 늘 주의를 줬잖아. 모두가 내 잘못이야…"

 "애나, 넌 항상 잘생긴 남자한테 약하구나."

 "나도 알아, 하지만… 그땐 값싼 유혹같이 생각되진 않았어.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느낌이었어. 그건 뭐랄까… 난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애나는 자신의 애처로운 말투에 놀랐다. 그것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슬픈 메아리와도 같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테사가 사려 깊게 말을 이었다.

 "그저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렴."

 "언니는 내가 더 배울 게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좋은 남자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정말이야."

 고통없는 사랑이란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걸까?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든든히 보호해 줄 수 있는 진실한 남자와 사랑을 하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럴 수 없는 결함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너도 알고 있겠지만 마틴이 널 무척 마음에 두고 있더구나."

 잠시 후 테사가 불쑥 얘기를 꺼냈다.

 "마틴이? 하긴…"

 "그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렇게 생각해?"

 애나는 힘없이 대꾸했다.

 "그래, 언니말이 맞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잖아."

 "편지를 하면 되잖니. 안 그래?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 사람을 만나볼 수도 있고."

 "마틴은 물론 좋은 사람이야. 그렇지만…"

 "무슨 얘긴지 알겠다. 그럼 저녁식사라도 같이하자고 하는 게 어때? 그 사람 곧 떠나게 될 테니까 말야. 그가 아주 기뻐할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네게도 마음을 돌릴 기회가 될지도 모르고."

 "저녁은 밖에서 먹을래. 언니와 형부도 쉬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아, 애나. 우린 괜찮다니까. 우리 걱정은 말고 마틴과 약속하렴."

 테사의 눈은 자신의 생각이 만족스러운지 밝게 빛났다. 이제 곧 동생의 마음이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럴게."

 애나도 동의했다.

 "틀림없이 멋진 데이트가 될 거야."

 테사가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말했다.

 "그럴 거야…"

 "네 마음도 가라앉을 거고."

 "나도 그러길 바래."

 "그럼 됐어. 좋아!"

 테사가 일어섰다.

 "난 들어가 봐야겠어. 엄마가 뭘하시는지도 모르겠고. 아마 지금쯤 화가 잔뜩 나셨을 거야. 가엾은 우리 엄마! 너도 알다시피 엄만 우리가 다투는 걸 제일 싫어하시잖니?"

 마틴 쇼트. 애나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좋아, 해보는 거야. 그렇게 생각을 가다듬자 간직했던 사랑과 함께 그 모든 문제들도 모두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근사해요!"

 그녀가 식탁을 차리고 있을 때 마틴이 말했다.

 "정말 고마와요, 애나."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애나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의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열정의 불꽃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기가 민망해서 얼음그릇에 얼음을 채우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비록 자신이 그를 유혹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다. 게다가 그에겐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조그마한 주방에서는 언니 내외가 일을 하고 있었다. 테사는 샐러드 드레싱을, 토니는 스테이크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약속했니?"

 테사는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마틴하고?"

 애나는 냉장고에서 얼음그릇을 꺼내 얼음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물론이지."

 테사는 약간 흥분해 있기까지 하다.

 "응, 계획을 세워 놨어. 그가 떠나기 전날 밤으로."

 "그가 기뻐하는 눈치던?"

 "글쎄, 꽤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애나, 애… 나!"

 아멜리아 던 부인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오면서 그들의 대화는 끊어졌다. 어머니는 입구에 나와 있었다. 촛불 모양의 무늬가 박힌 가운을 걸치고 취침용 모자까지 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엄마, 웬일이세요? 일찍 주무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테사가 책망하듯 물었다.

 "그렇잖아도 막 자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왜 나오셨어요? 우리 집 손님들은 유행을 아는 멋쟁이들이란 걸 모르세요? 엄만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신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단다. 보면 모르겠니? 애나를 부르러 왔단 말야. 전화가 왔어."

 "전화?"

 애나는 손에 들고 있던 얼음조각을 떨어뜨렸다. 얼음은 타일 바닥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그렇다니까."

 "저한테요?"

 "그럼 여기 너 말고 애나가 또 있니?"

 "누구라고 하던가요?"

 "바로 그 친절한 카사스 씨다. 매우 정중하고 매력적이더구나. 내 건강이 어떠냐고 묻길래 머리가 약간 아프다고 했더니 걱정까지 해주지 뭐냐. 햇빛을 너무 많이 쬐서 그럴 거라면서 말야."

 애나는 마치 싸늘한 두 손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아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은 꼼짝없이 굳어져 갔고 심장마비라도 걸릴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그녀는 다시는 크리스티안 카사스를 보지 않기로― 결코 얘기조차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자신의 의식 속에서 그를 완전히 지워 버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카사스가 본 자신의 마지막 모습은 문 앞에서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사랑의 키스를 보내던 모습이었다. 때문에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이리라.

 "저 여기 없다고 해주세요, 엄마."

 신장이 마구 뛰고 있지만 애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넌 여기 있잖니?"

 알 수 없다는 듯 부인이 반문했다.

 "난 벌써 네가 여기 있다고 말했는걸?"

 "그럼, 그새 외출했다고 얘기해 주세요.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잘 모르겠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차라리 애나가 통화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더 낫겠어요."

 테사가 화를 내며 끼어들었다.

 "그 남자에게 뻔뻔스럽다고 전해 주세요. 자신의 행동을 잘 생각해 보라는 말과 함께요. 그리고 두번 다시 전화 따윈 걸지도 말라고도 해주세요."

 부인은 너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어깨를 감싸며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 마, 신경쓰지도 말구. 내가 그에게 전해 주마, 사실대로 말이다."

 애나는 언니의 행동을 보면서 왠지 카사스에게 미안함 같은 걸 느꼈다. 격노한 테사는 무서운 악마처럼 보인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애나가 바로 돌아왔을 때 마틴이 물었다.

 "아무 일도 아니예요."

 그녀는 얼음그릇을 내려놓고 나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면서 들어서고 있는 한 무리의 영국인 관광객을 맞아들였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좀 드릴까요? 여행은 괜찮으세요?"

 "제가 술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애나?"

 마틴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녀는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그녀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저 지금 바빠요."

 그러나 그녀는 마틴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딱딱거릴 뜻은 없었어요."

 손님들이 조그마한 나무 테이블에 앉는 걸 보면서 애나는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금 전 몹시 피곤해요."

 "전 괜찮아요."

 그는 정말로 쾌활해 보여서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자, 한잔 어때요?"

 "그렇담 와인 한잔 하죠. 고마와요."

 "천만에요."

 그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솔직하게 말해서 난 우리의 데이트를 고대하고 있어요, 애나."

 "저도 그래요, 마틴."

 애나가 대답했다.

 "어쩌면! 마치 그림 속의 미녀 같구나, 애나!"

 던 부인이 기쁨에 차서 소리쳤다.

 마틴이 머무르는 마지막 날 오후 5시였다. 애나는 마틴과의 약속을 위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고마와요, 엄마."

 애나는 최선을 다해 몸치장에 신경을 썼다. 마틴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에 대한 사과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에서 가져온 고풍스러운 레이스 블라우스와 무늬 있는 바지를 입고 보석 브로치를 달았다. 눈에는 자신의 푸른 눈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회색빛 아이섀도를 발랐다.

 "쟤는 최신유행을 아는 멋쟁이 같지 않니?"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던 부인은 사위에게 물었다.

 "처제는 언제나 유행을 아는 멋쟁이인걸요."

 토니도 맞장구를 친다.

 "마틴이 기절하겠다, 얘."

 테사는 동생의 빛나는 긴 금발 머리를 빗어 주며 자신있게 말했다.

 마틴은 나와 맞지 않는다. 그를 생각하거나 그의 이름을 떠올려 봐도, 그 어느 것도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애나는 자신의 이러한 답답한 마음을 테사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마틴, 마틴, 마틴… 그 이름은 애나의 마음을 들뜨게 하지도 못하고 더구나 심금을 울리지도 않는다. 크리스티안 카사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이름만이 자기 주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고독한 순간, 잊혀졌던 시귀가 떠올랐다.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바이런의 시다. 그 한 편의 시가 꿈 많았던 소녀시절로 돌아가게 했다.

 사람들이 내 앞에서

 그대 이름을 욕되게 할 때

 내 귀엔 조종(弔鐘);

 이 내 몸, 몸서리치네.

 왜 그땐

 그토록 사랑스러웠던지.

 그들은

 나와 그대 사이를 모른다네.

 그대를 그토록 깊이 안고 있던 나는

 앞으로 길이길이

 그대를 한탄하리라,

 말로는 다 할 수 없게 깊이깊이.

 그 시는 그녀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어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가만히 눈물이 괴어온다.

 그때 눈치를 살피는 듯한 던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카사스 씨한테선 다시 전화가 없구나."

 "아주 잘된 일이야."

 테사가 잘라 말했다.

 "그래."

 애나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크리스티안은 6번 아니, 7번이나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그의 전화는 언제나 한 사람, 혹은 거기에 동조하는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차단됐던 것이다. 토니, 테사, 혹은 아멜리아.

 애나는 마음의 평온을 위해 전화가 오더라도 통화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멜리아 던 부인은 딸에게 책망을 들은 뒤로는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그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그 가엾은 젊은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정말이지 대단히 흥분한 음성이었단다."

 다음날은 테사가 그에게 경고를 했다.

 "애나는 당신과 얘기하는 걸 원치 않아요. 아뇨, 난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요… 자, 그럼 만족하셨나요? 만약 애나가 그렇다면 그앨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는 애나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이 너하고 통화하고 싶댄다. 할래?"

 "응…"

 애나는 흥분으로 떨면서 천천히 발을 떼었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바로 얘기했다.

 "난 당신과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리고는 수화기를 놓아 버렸다.

 전화는 끊겼다. 그것뿐이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스푼이 쨍그랑거리는 소리, 혹은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항상 전화 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곤 했다.

 "어디로 갈 생각이야?"

 토니가 물었다.

 "마틴에게 상류 사회를 보여 줄 건가?"

 "난 그저 해변가나 산책하려고 해요. 그러다가 바라도 보이면 차도 한잔 마시구 말예요. 아니면 레스토랑에라도 들어가죠, 뭐."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테사가 끼어들었다.

 "그래, 틀림없이."

 애나는 느릿하게 대꾸했다.

 "대단히 즐겁겠지…"

 "늦지 않으려 했는데…"

 마틴이 도착했을 때 시계는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다뇨, 전혀."

 애나가 말을 받았다.

 "정말이지 대단히 아름다우십니다."

 "고마와요, 마틴."

 "당신에게 주려고…"

 좀 어색해하면서 마틴은 그녀에게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어머나, 마틴,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것은 l970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낡아빠진 일이지만 애나는 적이 감격한 듯 발꿈치를 들고 그의 뺨에 키스를 했다. 그의 뺨은 소년처럼 부끄러움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들이 해변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있을 즈음에 마틴이 말했다.

 "당신과 테사, 그리고 토니 모두가 내게 보여 준 친절 말예요. 정말로 내 휴가를 근사하게 만들어 주셨어요."

 "저도 기뻐요. 아마 당신이 내년에 또 오신다면 우린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넥타이의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내 생각으로는… 아시겠지만… 당신을 계속 만나고 싶어요. 서로 연락도 하고…"

 마틴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다. 정말이지 추호도. 그에게 아픈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때때로, 어머니가 말했듯이 사람이란 친절하기 위해서 잔인해질 수도 있어야 한다.

 "마틴, 당신은 매우 좋은 분이세요 하지만 전 우리가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 말은 혹시라도 당신께서… 아시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애나."

 그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그건 굉장히 멋진 일이 되리라고 생각해요. 나 같은 사람이… 내 말뜻을 아실 겁니다."

 "당신은 훌륭한 분이세요. 당신 탓으로 돌리지는 마세요, 그건 제 탓이니까요. 최근에 난 아주 괴로운 경험을 겪어야 했어요. 난 별로 좋은 여자가 못돼요. 당신이 생각하고 계신 만큼…"

 그녀는 긴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가 당당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매우 실망했을 텐데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고 잃는 게 더 나아요."

 그는 낙관적인 운명론을 인용하려는 듯하다.

 "사랑해 보지도 못하고 잃는 것보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신다면 다행이에요."

 "그저 내 생각대로 말했을 뿐인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애나는 자신의 절망도 운명에 맡겨 버릴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입니다, 나는…"

 그는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저게 뭐지? 이런 우연이 있나! 저건 아까 봤던 오스틴 빅토리아인걸!"

 "뭔데요?"

 "왜, 아실 텐데요? 아까 우리 길을 막고 섰던 빨간색 소형차 말예요."

 "아, 저 차!"

 백미러를 통해 낯익은 차체가 보였다. 갑자기 그녀의 맥박이 빨라졌다.

 "아까 것과 똑같진 않은 것 같아요."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띠우며 말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잠시 그녀는 따라오는 차량들을 살폈다. 다시 백미러를 보았을 때도 오스틴 빅토리아는 여전히 뒤에 바짝 붙은 채 따라오고 있다.

 "우릴 따라오고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예요, 그저 방향이 같은 것에 불과할 겁니다."

 "정말이에요, 따라오고 있어요."

 그러나 애나가 스페인에서 보낸 짧은 기간은 끈질긴 우연의 연속이었다. 마치 우연의 법칙들로만 뒤엉켜 있는 것 같았다.

 길은 바닷가까지 가파르게 경사져 있었다. 해변에는 호텔과 레스토랑, 그리고 아이스크림 가게들, 바까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아직 6시가 채 못된 시각이다. 몇몇 가족들이 여기저기 바닷가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애나는 주차할 만한 장소를 찾아 차를 몰았다. 빨간색 소형차는 스쳐지나가 버렸다.

 "자 봐요, 가버렸잖아요?"

 마틴은 그녀의 불안을 재미있어하며 말했다.

 "난 참,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그녀는 겸연쩍은 듯 살짝 웃었다.

 "자, 가서 맥주라도 한잔 하시죠."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친절하고 순박한 사람과 함께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속고 속이거나, 또는 한 점이라도 더 따내려는 듯한 정신적인 싸움을 하지 않아도 좋은 정직한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매우 편안하게 해주었다.

 "영국에 돌아가면 뭘하실 거예요?"

 마지못해 음식을 들면서 애나가 물었다.

 마틴은 자기 몫의 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을 거뜬히 해치우고는 붉은 포도주로 입가심을 하고 있다.

 "일을 해야죠. 현실로 다시 뛰어드는 거예요 정말 즐거운 휴가였어요. 이처럼 말이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기뻐요."

 그녀는 잔을 들어 건배하자고 제의했다.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보다 멋진 미래를 위하여!"

 그는 테이블 위로 와인이 넘쳐흐를 만큼 세게 잔을 부딪쳤다.

 "제게 화나지 않으세요, 마틴?"

 "당신에게 화를?"

 그는 애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당신을 유혹했다고 느끼시진 않나요?"

 "아뇨, 전혀."

 "그럼 됐어요. 잠시만 실례하겠어요."

 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북적이는 레스토랑을 가로질러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는 인상적인 구식 테이블과 싱싱한 새우요리가 담긴 접시들을 지나쳐야 했다. 깨끗한 접시 위에서 생새우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가까이 지날 때 새우의 부서진 촉각이 마치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돌연 그녀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

 "지금 나가고 싶어요."

 테이블로 돌아오자 마틴에게 말했다. 이유를 설명할 필요까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그는 선선히 대답했다.

 "어쨌든 내일 나는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요. 그리고 저…"

 "네?"

 그녀는 웨이터에게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애나, 내일 공항으로 나와 줄 수 있겠어요?"

 "물론이죠."

 공항에서의 배웅은 매우 친밀한 사이에서의 깔끔한 이별인 것이다. 애나는 그를 캠프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네, 내일 아침에."

 그녀는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드디어 키스를 해야 하는 순간일까? 애나는 섣부른 포옹 따위의 어색한 행동에 대비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 안으로 몸을 구부려 그녀의 뺨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해서 그녀를 놀라게 했다.

 "저녁 고마왔습니다, 그건…"

 "아무 말 하지 마세요."

 그녀는 시동을 걸면서 웃음을 띠웠다.

 "정말 멋진 저녁이었어요!"

 빌라에 돌아왔을 때는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현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거리의 악사들은 레스토랑에서의 연주를 위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안녕?"

 "응, 왔니?"

 테사와 토니가 인사를 받았다.

 "엄마는 주무셔?"

 "응, 아까부터."

 "두 사람 모두 뭘하고 있었어? 순수하게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시겠지?"

 애나는 문득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애나는 언니와 형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가 잘못된 거야?"

 "어떤 남자가 왔었어."

 테사가 냉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관청에서 바 문제로 말야."

 "어떤 남자…?"

 "기획실 관리라는데 네가 나간 직후에 왔어. 건물을 조사하고 갔어."

 절망감에 싸인 애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치 벽에 무슨 해결책이라도 써 있는 듯이.

 "기획실 관리가 여기에? 그런데… 왜?"

 "왜는…"

 테사가 쓸쓸하게 웃었다. 아무런 뜻도 없는 바싹 말라붙은 듯한 차가운 웃음이다. 우린 끝장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게 끝나 버렸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애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그럴 리는…"

 "크리스티안 카사스가 배후에 있다는 거?"

 테사는 다시금 음울하고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자, 어떻게 생각하니? 애나의 사랑? 우습지도 않지, 교활한 인간 같으니라구! 카사스가 복수한 거야!"

 "하지만, 그가 그랬다고는…"

 애나는 뭔가 항의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곧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모든 걸 깨달았다.  소파에 주저앉으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9



 "자 그럼…"

 마틴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마틴은 바닥에 손가방을 내려놓고는 출발 라운지에 서 있다. 스피커에서 홀러나오는 안내방송이 비행편을 알리고 있었다.

 "시간이 된 모양입니다."

 마틴이 말했다.

 "그런 것 같군요."

 "덕분에 아주 편하게 왔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만원 버스 안에서 고생깨나 했을 텐데."

 "별말씀을요."

 "그리고… 그 동안 정말 즐거웠습니다.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어요."

 마틴은 약간 침울하게 말했다.

 "행운을 빕니다."

 "당신두요, 마틴. 모든 일이 잘되시길 바래요. 내년 이맘 때쯤엔 다시 만날 수 있겠죠?"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애나에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바싹 당겨 안더니 귀를 살짝 깨물었다. 애나는 얼떨결에 아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녀를 풀어 주는 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다.

 그녀는 탑승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키가 커서 그의 모습은 금방 눈에 띄었다. 그가 돌아서서 손을 흔들 때 그녀는 문득 마음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했다. 몹시 쓸쓸하다. 왠지 딘의 배신으로 비통에 잠겼을 때나 크리스티안 때문에 절망했을 때보다도 마음이 더 허전하다.

 투명한 햇빛 속을 걸으며 애나는 크리스티안을 떠올렸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명예를 저버린 걸까? 테사와 토니의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들을 그대로 두겠다고 약속을 했으면서. 그 약속에 조건 따윈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깰 권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포악하고 속임수나 일삼는 사람이란 말인가!

 "난 나 자신의 길을 가고 싶소."

 그는 이렇게 말했지. 그리고 자신은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어왔다.

 토니와 테사에게 너무 많은 고통을 안겨 줬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뭘까? 테사는 크리스티안이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공권력의 개입을 다시 철회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접어 두고 그를 다시 찾아가 볼까? 그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그는 도무지 양심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비열하게도 아수세나의 질투심에 불을 지르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 나의 육체와 사랑은 그에게 있어선 단순한 노리개에 불과했던 것이다.

 만일 다시 크리스티안을 찾아간다면 또다시 그의 노리개가 되겠지. 그에게 양심 따위를 기대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에게는 오직 번득이는 교활함과 오만불손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나를 골탕먹이기 위한 함정임이 분명하다.

 애나는 마음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자신의 굴욕감, 비열한 회유, 크리스티안의 자기 도취…

 그는 만족해서 두 팔을 벌리며 말하겠지.

 "오 애나, 나의 사랑,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이런 기억들을 변색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크리스티안과 보냈던 밤을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쳤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일들은 더욱더 또렷하게 떠오른다. 금빛 찬란했던 시간들이 회상의 잿빛 미광 속에서 퇴색한 빛깔이 되어 나타난다. 사랑의 가면을 쓰고 스쳐간 모든 것들이 역겹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의 키스와 포옹을 생각하면 저절로 소름이 끼쳐 온다.

 헝클어진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그의 모습, 자기의 모든 동작을 따라 움직이던 그의 검은 눈동자, 그리고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의 육체… 그녀는 너무도 비참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애나는 주먹을 꼭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크리스티안 앞에 바쳐지는 제물이 되지는 않으리라. 영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애나는 심한 괴로움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그때 갑자기 후닥닥하는 발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애나는 어느 새 억센 힘에 붙잡혀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도움을 청할 틈도 없이 대기하고 있던 차 뒷좌석에 난폭하게 끌려 들어갔다.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얼굴이 시트에 파묻히면서 플라스틱 쿠션 냄새로 인해 숨이 막혔다. 유괴를 당하고 있다는 공포감으로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심장이 터질 듯이 팽창하고 있다. 호흡은 가빠지고 고통으로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뒤틀어진다.

 "뭐예요! 어디로?"

 겨우 그렇게 소리쳤을 뿐이다.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항의 포장도로를 가로질러 나갔다. 그제서야 그녀를 납치한 사람은 잡고 있던 손의 힘을 뺐다. 비로소 머리를 든 애나는 충격적인 사실로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카를로스!"

 카를로스의 눈은 검은 선글라스에 가리워져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굳게 다문 입이 냉정함을 말해 주고 있다.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가시고 마음이 놓이면서 동시에 그녀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유괴를 당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크리스티안의 우람한 부하에 의해 강제로 모셔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왜일까?

 "카사스 선생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카를로스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덧붙였다.

 "당신이 그분과 만날 시간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래요? 그가 정말 그랬어요?"

 애나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렇다면, 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 차를 세워 달란 말예요!"

 카를로스도 운전사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신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애나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설득력 없고 가련하게 들렸는가를 알았다. 운전사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애나는 차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앞유리를 통해 빨간색 보네트가 보였다. 비로소 자기가 어디에 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오스틴 빅토리아다. 문득 앞좌석에 있는 소형 쌍안경이 눈에 띄었다. 요 몇 주 사이에 벌어진 우연들과 지금 벌어진 기묘한 사건의 해답이 거기 있었다.

 뒤를 보지 않은 채 운전사는 카를로스에게 스페인 말로 낮게 속삭였다. 카를로스는 뭔지 알 수 없는 소리로 투덜거렸다. 머리를 짧게 깎은 운전사의 뒷모습을 보며 애나는 뭔가 또 다른 수수께끼의 단편이 아직 남아 있다고 느꼈다.

 "당신들은 곧 후회하게 될 거예요."

 애나는 또 카를로스에게 항의했지만 역시 들은 척도 않는다.

 "날 만나고 싶다면 그는 왜 직접 날 부르지 않는 거죠? 부탁이에요, 날 여기서 내려 주세요. 그리고 당신의 보스에게 전하세요. 날 만나려면 직접 바로 오라고요. 그리고 이런 식의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요."

 "우린 명령을 받았습니다."

 카를로스는 짤막하게 대꾸하고 나서는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어요."

 애나는 뭔가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식구들이 절 찾을 거예요. 게다가 우리 언닌 임신중이란 말예요. 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언니는 날 기다리며 애태우다가 결국 경찰을 부를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공항에 세워져 있는 내 차를 발견할 테고 곧 엄청난 소동이 벌어질 거예요."

 "카사스 선생께서는 당신을 오래 잡아 두진 않을 거요."

 한결 부드러워진 대답이 들려왔다.

 애나는 포기한 채 입을 다물고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빌딩과 나무들, 그리고 때로는 숲이 우거진 지역들이 스쳐지나가고 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그녀의 질문에 누구 한 사람 대답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바누스 항에 도착했을 때 그 대답은 명확해졌다. 차는 해변가의 보행자들에 막혀 잠시 정차하고 있었다. 애나는 이때다 싶어 도어의 손잡이에 손을 댔다. 그러나 곧 뭔가 둔탁한 물체가 그녀의 옆구리를 압박해 왔다.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겠소, 던 양."

 카를로스가 위협을 했다.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차는 흰 요트가 정박하고 있는 곳에 다다랐다. 네누파르는 마치 비취빛 바다에 조용히 떠오른 새하얀 수련처럼 빛나고 있다.

 "천천히 내리시오."

 카를로스가 그녀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배에 오르시오. 난 당신 뒤에 있으니 딴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러지 않겠어요. 약속하죠."

 애나는 정말로 그가 자기를 단숨에 어찌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선선히 대답했다.

 그녀는 육지와 연결돼 있는 배의 트랩을 향해 머뭇거리며 걸어갔다.

 "계속 가시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카사스 선생께서 오래 기다리시는 걸 원치 않소. 아시겠소?"

 애나는 갑판 아래를 향해 걷고 있었다. 모두가 낯익은 것들이다. 물 위에 떠 있다는 아주 희미한 느낌마저도. 그녀는 화려한 선실로 들어섰다. 그곳에 바로 크리스티안이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어떤 도면에 몰두해 있었다.

 "던 양을 모셔왔습니다, 선생님."

 카를로스가 말했다.

 크리스티안이 돌아섰다. 애나는 그의 수려한 얼굴에서 석고상 같은 차가움을 느꼈다.

 "아, 사랑스러운 나의 애나, 이렇게 와주어 정말 고맙구려!"

 그 목소리는 조롱처럼 들렸다.

 "너무나 뻔뻔스럽군요!"

 그녀는 주먹까지 불끈 쥐며 분개했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짓인지 알기나 해요?"

 그녀는 한 발 다가섰다.

 "부하를 시켜서 날 납치하다니. 게다가 총으로 위협까지 해서…"

 "총으로 위협했다구?"

 그는 정말 놀라는 눈치다. 그의 섬세하고 짙은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미심쩍은 듯 그녀의 어깨 너머로 카를로스를 쳐다보았다.

 그 건장한 스페인 사내가 웃었다. 애나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는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성의 물체를 손에 쥐고 위로 쳐들었다가는 다시 내리며

 "빵!"

 하고 소리쳤다. 그리곤 손바닥을 펴보인다. 담배 케이스였다.

 "난 뭔가를 생각해야만 했소."

 크리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곤경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았지."

 "그게 당신과…"

 애나는 그에게 따져 물었다. 그때 크리스티안 뒤로 젊은 운전사가 보였다. 버릇없고 무례해 보이는 젊은 사내다.

 "아니, 당신은…"

 애나는 당혹하여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는 카를로스와 크리스티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중에 누구라도 그녀에게 설명을 해주기를 바라면서.

 "너희들은 이제 가도 좋아."

 크리스티안이 자기 부하들에게 말했다.

 "애나와 난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들은 말없이 돌아서서 나갔다. 요란스럽게 층계를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애나…"

 크리스티안은 자리에 앉으며 가까이 오라고 권했다. 애나는 그를 노려보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앉아서 얘기하는 게 편하지 않겠소?"

 "앉고 싶지 않아요.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알고 있소. 곧 보내 주겠소, 곧."

 그는 손을 저으며 안심하라는 듯 말했지만 그 행동은 애나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면 바지와 인디언 풍의 셔츠를 입고 있다. 애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손이 얼마나 수없이 그 볼을 어루만졌는가를, 그의 교활하고 번뜩이는 눈이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이글거렸는가를, 그리고 얼마나 부드럽게 애무했던 육체였는가를 떠올려 보았다.

 "솔직하게 설명해 주시겠어요?"

 애나가 물었다.

 "제발 좀 앉기나 해요."

 애나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나 그의 곁으로 가는 대신 넓은 중국식 카펫을 가로질러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크리스티안은 한 팔을 등받이 뒤로 내리고는 다리를 포갰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 흥분된 미소가 감돌았다.

 "애나, 사실 당신도 내게 해명해야 할 게 있잖소?"

 "당신은 우선."

 그녀는 도전적으로 말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행동을 했어요."

 "오, 하지만 난 구제받을 수 없을 만큼 무모한 사람은 아니오."

 그도 맞섰다.

 "난 당신이 내 사정을 어느 정도 고려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고려라구요?"

 그녀는 멸시하듯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한 정당화인가요?"

 "좋을 대로 생각하구려."

 "그 사내, 운전사 말예요. 난 그를 알아보겠어요. 하지만 그렇게 질이 나쁜 강도들을 고용해서 당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어요."

 "페페는 강도가 아니오."

 크리스티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인했다.

 "맙소사,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그 사내가 은행 입구에서 내 핸드백을 강탈했던 건 뭐죠? 그날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도둑질이 아니라면 대체 뭐라고 해야죠, 그런 걸?"

 "페페는 근 2년 동안 나를 위해 일해 왔소. 그는 가장 믿음직스럽고 정직한 내 부하요."

 "그럼, 그땐…"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소, 애나. 고백하지. 그건 내 아이디어였소. 내가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켰지. 당신의 주목을 끌기 위한 연극이었지. 그리고 결과는 대단히 효과적이었소."

 그는 약간 주춤거리며 손을 들어올려 상처입었던 부분을 가리켰다.

 "그러나…"

 애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짓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당신이 내게 말해 준 모든 것들이 다 그렇지만."

 "하지만 애나, 당신은 내가 비록 당신 언니의 관점이긴 했지만… 뭐라 했더라… 기억이 날 거요. 당신은 언니 말만 듣고 나를 아주 몹쓸 놈으로 여기고 있었소."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요."

 애나가 그의 말을 끊었다.

 "만약 당신이 나와 사귀고 싶어했다면 뭐랄까, 좀더 정중하게 예의를 차려서 프로포즈를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소."

 "그건 진실이 아니예요, 크리스티안!"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쉽사리 그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 데 대해 놀랐다.

 그녀는 일어나서 이 방에 도착했을 때 그가 열중해서 보고 있던 도면으로 다가갔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조종해야 할 것들이군요."

 애나는 침착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꼭두각시의 주인이에요, 그렇죠? 당신이 줄을 잡아당기는 동안 모든 사람들은 따라서 춤을 추게 되죠."

 그녀가 따져 묻자 그는 빙긋이 웃었다.

 "오 애나, 당신은 날 너무도 잘 알고 있소. 당신 말은 매우 정확했소. 사실 난 모든 상황을 내 손안에 쥐고 싶어했지. 하지만 난 변할 수 있었소. 그리고 이미 그 얘기는 당신에게 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오. 난 내 자신이 새롭게 바뀌었다고 믿고 있소. 당신이 보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그림을 주시하고 있던 눈을 돌려 커다란 호기심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면서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숨김없이 모든 얘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누군가에 의해 심하게 절망했던 이래로 항상 그래왔던 것 처럼, 애나에게도 그대로 자신을 밀고나갔소. 나는 내 나름의 삶을 정립시키기 위해 온 힘을 쏟았소. 따라서 다시는 절망하지 않을 거요. 솔직히 말해서 난 타인이 나를 방해하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았었소. 남자건 여자건, 또는 환경이건 말이오. 그렇소, 그것이 내 활동방식, 그리고 주관이었던 것이오. 그러나 그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뭔가를 깊이 생각했다. 그는 의자의 딱딱한 팔걸이를 꽉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때, 나의 인생에 조그마한 요정이 나타났소. 그 요정은 빛나는 금발에 순진무구한 푸른 눈동자, 키스를 기다리는 듯한 입술을 가졌다오. 그 요정은 바람둥이도 아니었고 매우 깔끔하고 품위도 있었소.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했소. '난 조심스럽게 다가서야 한다. 그녀가 날 이용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져야만 해'라고 말이오."

 "이용해요? 당신을?"

 애나는 기가 막혀서 소리쳤다.

 "만약 이용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당신 쪽이에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마치 벽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 크리스티안은 다시 독백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하는 게 돈이 아니라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소. 내 배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오, 아니예요. 난 물론 배가 맘에 들기는 해요. 그러나 좋아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소."

 그의 말은 애나 자신도 느끼고 있는 자신의 까다로움을 너무나 정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내 재산을 탐내는 게 아니라면 그녀에게 또 다른 동기가 있는 걸까? 그녀의 언니와 형부는 그녀에겐 소중한 사람들이지. 그렇다면 그녀는 나와 그들과의 사소한 불화를 무마하려고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척하는 건 아닐까?"

 "아무런 불화도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크리스티안에게 상기시켰다.

 "만약에 당신이 그처럼 이기적이거나 고집스럽지만 않았다면 말예요."

 "조용히, 조용히 해주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애나, 내가 당신의 진실을 의심했던 걸 알아야 하오. 난 당신과 사랑에 빠지길 바라진 않았소. 당신의 관심이 단지 그런…"

 "정말 어리석군요!"

 그녀는 힐난조로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도 마음이 삐뚤어졌나요. 정말 모든 걸 그렇게 왜곡시켜서 받아들일 거예요?"

 "어리석다구? 그렇지만 당신도 매우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는…"

 "네, 나도 그랬어요."

 애나는 중간에 끼어들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그래도 당신은 잘 이겨내지 않았소? 내겐 당신처럼 자신을 회복해내는 능력이 결핍돼 있는 것 같소."

 "그러나 한 번의 좌절로 미래를 모두 망쳐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소. 하지만 난 내게 일어났던 일들이 무척이나 괴로왔소."

 "나도 알아요."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스커트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에 앉아서 크리스틴과 얘기를 나누며 결국에는 자신이 그에 대해 품었던 나쁜 감정을 떠들어대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가 걸어온 행적에 대해 끝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 건가? 마음속에 그를 잊어버리기 위해 쌓아 두었던 벽들이 차츰 허물어져 가고 있다. 그녀는 은근히 화가 났다.

 "좋아요, 당신은 한때 절망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것으로 모든 게 설명되리라고 믿었나요? 테사와 토니에게 한 행동은? 그리고 또 내게는? 어린 루시아나에게 저지른 짓은?"

 집시 여자에게 생각이 미치자 분노가 끓어올랐다. 더 이상 그의 참회 따위를 듣고 있을 필요가 없다. 애나는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뻔뻔스런 인간! 여지껏 온갖 파렴치한 행동을 다 해놓고 나서 사람을 강제로 잡아다가 변명이나 늘어놓다니.

 애나가 문을 열려고 하자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뒤로 끌어당겼다. 그가 난폭하게 돌려세우는 바람에 애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녀는 그가 억지로 키스를 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한 얼굴로 차갑게 물었다.

 "루시아나가 어쨌다고?"

 "오, 그녀가 내게 모든 걸 말해 줬어요. 걱정할 것 없어요."

 애나는 조롱하듯이 대꾸했다.

 "난 모든 걸 알아요. 당신이 그녀에게 한 짓, 그리고 당신과 아수세나와의 모든 것도. 난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겠어요. 당신은 비열한이라고 말예요!"

 순간 그의 눈동자가 괴로움으로 일렁거렸다. 그때였다. 배의 내부 어딘가에서 거대한 엔진의 굉음이 들렸고 갑작스런 진동이 왔다.

 "저게 무슨 소리죠?"

 애나가 물었다.

 "우리는 바다를 향하고 있소."

 그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당신 맘대로 날 어쩌진 못해요. 절대로!"

 애나가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자신에게서 그를 밀어내고 탈출할 만한 틈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노라는 조그마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달아나고만 싶다. 자신의 마음을 녹이는 그런 감정은 이성을 배반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경고다.

 "애나, 제발 그러지 말아 줘. 난 당신과 함께 항해하고 싶소."

 "하지만 이 배는…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았다고 했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항해를 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으니까. 어찌됐건, 우린 좀더 멀리 나가야 할 필요가 있소. 그리고 당신은 내가 모든 상황을 완전히 알 수 있을 때까지 나와 함께 여기 있어야 하는 거요."

 "날 붙잡아 두진 못해요. 난 빠져나가고야 말 테니까. 헤엄을 쳐서라도 돌아가겠어요."

 "난 당신이 수영을 썩 잘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애나?"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놀려댄다.

 "육체적인 용기는 모자라는 편이라고 내게 말하지 않았소? 설사 당신이 용기를 낸다 해도 그렇게 멀리까지 헤엄쳐 갈 만큼의 힘이 있을까?"

 "난 실종되겠죠."

 그녀는 쏘아붙였다.

 "사람들이 탐색반을 보낼 거예요. 헬리콥터도 동원될 거고, 당신은 감옥으로 보내지겠죠."

 "하지만 애나, 누가 여기까지 당신을 찾으러 오리라 생각하오?"

 "그들은 결국 날 찾아내고야 말 거예요. 걱정 말아요!"

 "내 생각엔 그러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될 텐데? 적어도 우리가 얘기를 충분히 나눌 수 있을 만큼."

 "듣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요?"

 애나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그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열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갈망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던 속삭임이 점점 커져갔다. 가슴속 깊이 감추어져 있던 열정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애나는 자신에게 강하고 충실했다. 그의 끈질긴 요구에도 아랑곳없이 차갑게 굳어 버린 그녀의 입술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벼운 한숨을 쉬며 크리스티안은 그녀를 풀어 주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서 불쾌감과 책망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요트가 서서히 항구를 빠져나가는 걸 알고 애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곤란해요."

 애나는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실수를 하고 있어요. 나와 진지하게 얘기를 나눌 생각이라연 나를 바다로 데리고 와서는 안 되죠."

 "왜 그렇지?"

 "사실은…"

 그녀는 애처롭게 고백했다.

 "난 배멀미를 한단 말예요."

 그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녀의 턱을 살짝 건드렸다.

 "당신 말이 옳아. 자, 이리 와요, 이리 와서 앉으라니까."

 그는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이 그녀의 손을 이끌어 소파로 데려갔다. 그녀는 순순히 따랐다.

 "루시아나가 어쨌다고?"

 "그녀는 내게 모든 걸 말해 주었어요."

 "애나, 제발!"

 크리스티안은 이마를 손으로 쳤다. 그의 눈썹은 극심한 좌절감을 나타내고 있다.

 "제발 그만두오. 도대체 그 버르장머리없는 애가 당신에게 말했다는 그 모든 것이라는 게 뭐요?"

 "너무하시는군요."

 애나는 그를 나무랐다.

 "당신이 동침했던 여자를 그렇게 말하다뇨."

 "내가? 루시아나하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자 애나, 내게 모든 얘기를 해줘요. 우린 마침내 진실을 알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소."

 "저, 그녀는 내게…"

 애나는 머뭇거리며 얘기를 시작했다.

 "당신이 아수세나를 사랑한다고…"

 "그건 사실이었소."

 그는 홀가분하게 고백했다.

 "내게 그렇듯 많은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은 바로 그녀였소."

 "그래요, 루시아나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아수세나가 어떻게 당신을 거절했는지도 말해 주더군요. 그러면서도 당신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보면 아직도 질투를 한다고요."

 "아수세나는 아주 제멋대로인 여자였소."

 "나도 알아요. 어쨌든 루시아나는 당신과 같이 있는 장면을 들킨 후에 그녀로부터 해고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누구와 동침했다고!"

 그는 분개하며 소리를 질렀다.

 "왜요? 루시아나와 당신이 말예요. 아수세나가 질투심에 불타서 루시아나를 해고했다던데요. 그리고 당신은 죄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공한 거라면서요?"

 크리스티안은 아무 말도 없이 다만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고만 있다.

 "당신이 항상 백합을 가까이 두고 있는 이유도 아수세나를 못 잊어서고, 또 그 때문에 이 배의 이름도…"

 "루시아나가 그런 걸 모두 당신에게 말했소? 언제?"

 "그날 아침이었어요. 우리가…"

 애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뺨을 살짝 가렸다.

 "그럼, 당신은 그 말을 믿었단 말이오?"

 "물론이죠. 사실이 아니라면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겠어요? 그때 비로소 난 당신에게 내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잠시 그는 우리에 갇힌 사자처럼 카펫 위를 왔다갔다 했다. 애나가 한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하는 듯하다. 마침내 그는 멈춰서서 활활 타오를 것 같은 강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스 던, 지금부터 당신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겠소."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에 대해서 당신은 들어야만 해요. 이해해 주겠소?"

 "네."

 그녀는 얌전하게 대답했다.

 "커피 좀 들겠소?"

 애나는 그가 갑자기 정중한 태도를 취하는 데 약간 당황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요."

 "좋소."

 애나가 불안해져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동안 그는 천천히 선실 안을 걸었다. 그가 자기에게 하려는 말들이 무엇인지 듣기가 두렵다.

 "내가 아수세나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겠소."

 그는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우리들 사이엔 늘 호기심의 불꽃 같은 게 존재하고 있었지. 그녀는 내 사촌이오. 알고 있었소? 그래, 알고 있었겠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알고 지내왔소. 우리의 부모들은… 음, 당신도 알겠지만 그들은 우리들을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생각하고는 우리에게 같이 지내도록 강요했지. 그래서 우린 언젠가는 결혼해야 할 사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소."

 "그런데 오직 그녀만이 그걸 원치 않았군요."

 "말을 가로막지 말아요."

 "미안해요."

 애나는 진정으로 사과했다.

 "괜찮소. 가끔 그녀는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으나 대개는 그렇지 못했소. 그녀는 너무 제멋대로인데다가 지극히 이기적이었지."

 애나는 혹시 아수세나가 그의 유일한 여자가 아니었다는 고백이라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당신은 우리가 닮았다고 생각하오?"

 애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소. 비록 나는 그녀보다는 좀더 온화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사람들은 외모까지도 비슷하다고 했소. 뭐랄까, 그런 말이 있지? 자아도취의 오류.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그에게 빠져들게 되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소. 어쨌든 우리는 결혼을 준비했었소. 그러나 그녀가 취소시켜 버렸지. 그러더니 나중에서야 마음을 바꾸어 내게 결혼해 달라고 애원하더군. 그렇지만 그때 난 이미 그녀와 나 사이에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소."

 "그렇다면 백합은 어떻게 된 거죠?"

 애나는 궁금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신이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당신은 나를 감상적인 백치라고 생각하오?"

 "글쎄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렇소. 난 바보가 아니오. 난 꽃장수와 거래를 갖고 있을 뿐이오. 그 여자는 내게 가장 좋은 꽃을 보내 주고 있소. 꽃을 고르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 꽃장수요. 보다시피 오늘도…"

 그는 테이블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글라디올러스를 가리켰다.

 "알겠어요. 그럼 배는 어떻게 된 거예요? 루사아나는 네누파르란 이름이 아수세나처럼 백합을 뜻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명명했다고 하던데요?"

 "오, 맞아요. 그녀를 본따서 배 이름을 지었소."

 그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 이름을 고른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수세나였소. 내 말을 믿어요, 애나. 그녀는 나보다 더 허영심이 많고 더 이기적이었지."

 "믿을 수 없어요!"

 그녀는 웃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겠지?"

 그는 짓궂은 농담으로 그녀의 말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불행히도."

 "그럼 루시아나는?"

 "그녀는 나이도 어린데 이간질의 명수로군. 아수세나도 내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지. 하지만 난 어린 그녀를 불쌍하다고 여겼소. 애나,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말아요. 당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나도 양심은 있소."

 그는 조바심이 나는 듯 말을 이었다.

 "아수세나가 루시아나를 해고시킨 건 그녀의 손버릇 때문이라고 내게 말했었소. 루시아나가 내게로 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뭔가 잘못됐다고, 자신은 부당하게 누명을 썼다고 말했소. 그녀를 도와 주려고 일자리를 제공했던 것뿐이오. 당신도 아수세나가 어떤 여자 인가를 알았다면 그 사건은 루시아나를 내쫓기 위해 꾸며낸 일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을 거요.

 어쨌든 루시아나는 내게 무척 고마와했소. 하루는 감기에 걸려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녀가 약초를 가지고 날 찾아왔소. 물론 난 무척 고맙게 생각했지. 그런데 그녀는 따뜻한 친절 이상의 것을 나에게 제공하고 싶어했소. 아마도 자기 딴에는 나에 대한 은혜를 갚고 싶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뭐랄까… 이를 테면 잠자리를 같이하겠다는 거였소."

 "그래서요?"

 "그녀에게 문을 가리켰지."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아무 여자나 좋다는 그런 유의 남자는 아니오. 나는 그녀에게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널 구별해서 대우하고 있다'라고 말했소. 나는 그 당시 루시아나가 내 말을 충분히 이해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내게 앙심을 품었던 모양이오. 그렇잖소?"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난 지금 진실을 얘기하고 있소!"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안타깝다는 듯이 애나를 바라보더니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파요!"

 그가 허리를 너무 세게 안았으므로 애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는 그녀를 놓아 주는 대신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키스를 하기 위해 머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바로 앞에서 멈추는 바람에 그녀는 그의 뜨거운 시선과 마주쳐야 했다.

 키스해 주세요! 애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지금 당장 키스해 줘요!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그의 사랑을 갈망하고 있는가를 깨달았다. 자신이 겪었던 쓰라린 상처도, 아픔도, 굴욕도 그의 키스로써 모두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루시아나가 앙심을 품었다고 생각진 않소?"

 그는 애나가 자기의 얘기를 믿는지를 묻고 있었다.

 "그래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마침내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팔이 그녀를 끌어안자 애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몸을 의지했다. 애나는 그에게서 위로를 받고 있었다. 크리스티안은 애정으로 애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그녀를 살짝 들어올렸다가 바닥에 내려놓는다.

 "당신이 전화했을 때…"

 그녀는 속삭였다.

 "내가 전화했을 때 당신이 나와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소. 우리가 통화만 했더라도, 애나,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요. 이토록 비참함과 절망 속에 빠질 필요도 없었을 테고."

 "지금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땐…"

 "그땐 내가 당신을 이용하고 있다고 느꼈겠지?"

 "그랬어요."

 "그럼 당신에겐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단 말이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절대로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안 돼."

 그는 그녀를 나무랐다.

 "당신은 알고 있었을 거야. 적어도 당신의 마음은 말해 주었을 텐데?"

 "그랬겠죠."

 그녀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 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을 심정이 아니었어요."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게 했소. 그 다정한 부인을. 난 무척 당황했었소."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세요."

 "그리고 당신의 언니, 세상에 그녀가 얼마나 나를 미워하는지!"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당신은 바 문제로 언니를 비참하게 만들었어요, 크리스티안. 사실… 당신은 아주 나쁜 행동을 했어요."

 "그땐, 그때는… 그러나 난 변했노라고 말하지 않았소? 내게 솔직하고 공정한 태도를 갖게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소."

 "만약 그렇다면."

 애나는 그때서야 문득 어제의 사건이 생각나서 그에게 따져 물었다.

 "왜 당신은 약속을 어겼죠?"

 "난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소!"

 그는 강하게 부인했다.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나는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오."

 "좋아요,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문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 훌륭한 신사라면 어제 기획실 관리가 왜 바를 둘러보고 갔는지 설명해 보시죠. 대답해 보란 말예요, 크리스티안 카사스 씨!"

 그리고 나서 애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한 번에 두 계단씩 뛰어올라가자 갑판이 나왔다. 눈부신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애나! 애나!"

 그녀는 뒤에서 그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기묘한 술래잡기를 했다.

 "당신은 잘못 알고 있는 거요!"

 그가 낮은 선실 지붕을 가로질러가는 그녀를 불렀다.

 "나는 빌랄바를 고발하지 않았소, 난 장담할 수 있소!"

 "그러면 누가 그랬죠?"

 "아마 이웃들 중의 하나겠지. 난 거기에 대해서는 모르오. 난 그 일과는 상관이 없소. 정말이오."

 "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 왜 내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크리스티안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침내 그는 그들이 첫 키스를 나누었던 배의 난간 옆에서 그녀를 붙잡았다.

 "난 당신이 배멀미를 한다고 들었는데?"

 그가 말했다.

 "상기시키지 말아요!"

 그녀는 자신이 그런 유난스런 병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안하오. 하지만 가장 좋은 해결책은 당신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길을 찾는 거겠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뺨은 그 동안 여위고 까칠해져 있다.

 "당신의 부하들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가 끈질지게 물었다.

 "해변에."

 "당신이 그들에게 날 감시하라고 했나요? 그렇죠, 나를 미행하게 했죠?"

 "그렇소, 페페가 당신을 지키고 있었소."

 "그래서 내가 가는 곳마다 항상 나타났던 거죠?"

 "아, 그래. 바닷가에서 만난 것 말이지? 하지만 내가 시내에서 당신 어머니를 만났던 건 정말 우연이었소."

 "대단히 치밀한 진행이군요. 당신은 정말로 사람을 소유하려는 기질이 있어요, 그렇죠?"

 "난 정말 당신을 소유하고 싶었소, 애나."

 그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당신을 차지하고 싶었소. 그러나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하려는 생각은 없소. 당신을 내게 묶어 놓고 괴롭히려는 건 아니오. 난 당신이 자유롭기를 원하오."

 "모든 사람은…"

 애나가 말했다.

 "자기자신을 항상 자유롭게 느낄 수 있어요."

 "그것은 자신을 알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아는 특별한 사람의 경우요."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 보내는 찬사였다. 언젠가 그는 애나는 건전하고 변함이 없으며 자신을 잘 아는 여자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신이 당신 자신을 좋아하는가의 문제가 있소."

 그가 말을 이었다.

 "즉, 일단 당신은 당신 자신과 친해져야 하지."

 "당신은 자기자신을 좋아하나요?"

 "난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소, 전혀."

 "그렇지만 나는 좋은걸요."

 그녀가 속삭였다.

 "난 당신을 좋아해요. 자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온 훌륭한 사람,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 좋아요."

 "그 남자는 당신 때문에 괜찮아졌지. 그렇지?"

 "그 남자는 나로 인해 보다 더 훌륭해졌어요."

 "애나…"

 그의 검은 눈동자는 뭔가를 찾으려는 듯 그녀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그 남자와 결혼해 주겠소?"

 "그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는 원하고 있소!"

 크리스티안은 그의 넘치는 사랑의 증표로서 그녀와 키스를 하기 전에 다시 말했다.

 "물론이오, 내 사랑 애나. 그는 진정으로 원하고 있소."

                           < 끝 >